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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Nov 25. 2023

기록으로 남겨진 것 만 기억된다

"깜깜했다. 당연히 켜져 있어야 할 전등이. 그리고 내 생각도 암연이 되었다."


지하 2층 상가에 근무하는 사람이 사무실로 급하게 찾아왔다. 상가 앞쪽에 있는 전등이 전부 소등되어 버렸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누전차단기가 내려간 것으로 생각하고 지하 2층의 전기배선 전용실로 갔다. 아무리 쳐다봐도 내려간 누전차단기는 없었다. 상가 쪽에 있는 별도의 분전반도 열어 확인해 봤다. 그곳에는 해당되는 배선 자체가 없었다. 무엇일까? 막막했다. 일단 도면을 확인하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지하 1층 현관 쪽에도 소등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도면에는 각 층의 전기배선 전용실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확인되는 것이 없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력감이 몰려왔다.


조금 전에 나와 근무교대하고 나갔던 윗사람에게 연락했다. 내가 연차를 쓰는 바람에 대신 주간 근무하고 퇴근해서 막 집에 도착한 터였다.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분전반 사진을 찍어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아마도 내려간 누전차단기를 못 찾고 있는 정도의 가벼운 문제로 여기는 것 같았다. 사진을 보내고 나니, 잠시 후 답이 왔다. 곧 들어와 보겠다고. 윗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소등된 상가에서 독촉이 왔다. 거기에다 현관을 지나는 입주민들이 "왜 이렇게 어둡냐?"라고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마음은 급했지만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답답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온 윗사람은 '아직도 이 정도를 처리 못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라 도리가 없었다. 이참에 새로운 것을 배우자는 자세로 윗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내가 이미 점검했던 장소를 다시 한번 돌았고, 특별한 것이 없으니 도면을 확인하는 것이다. 윗사람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뾰족한 방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내일 추가 확인하기로 결정하고 마무리했다. 다음 날, 나는 그날 근무자에게 인계하고 퇴근하였다.


하루를 쉬고 다시 근무를 하기 위해 지하 1층 현관을 들어서는데 전등이 모두 점등되어 있었다. 어쨌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여서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인계를 받으면서 들은 문제 해결과정은 황당했다. 체계적인 추적을 거쳐 찾아낸 멋진 스토리텔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무작위로 스위치를 끄고 켜보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볼품없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치가 도면 하고는 무관하게 아무 근거 없이 설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설비를 현재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다행스럽게(?) 그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CCTV를 돌려보았다. 그 스위치가 설치된 곳이 엘리베이터 앞쪽이었는데, 연인들이 찐한 스킨십을 하면서 등부분으로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장면이 목도되었다. 여하튼 그 연인들 때문에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추측컨대 공사 중에 누락되어 편의 위주로 공사를 마무리했고, 누군가의 용인 아래 준공검사까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또 겪게 되었다. 옥상의 수도꼭지를 통해 물을 사용할 일이 생겨 틀어 보았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윗사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 도면도 보고 배관라인을 따라가 보면서 보물 찾기를 했다. 결국 의심되는 곳을 발견했는데, 문의 네모서리가 볼트로 체결된 격실이었다. 볼트를 풀어내고 들어간 격실에는 전등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이용해 격실의 후미진 곳에 설치된 배관 밸브를 발견했을 때는 정말 보물을 찾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도면에도 명시되지 않은 채, 사람을 통해서 인계도 되지 않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보직에 가면 과거자료를 소중하게 여겼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있지만,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보직을 마칠 때면 많은 자료를 정리해 넘겨주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공식적인 문서만 남기고 나머지는 구두로 인계하고 떠나도 문제 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근무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를 다음 사람이 똑 같이 반복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가능하면 구두보다는 기록된 자료로 인계해주려 했다.


내가 이곳에 근무하면서 쉽게 업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기록된 자료의 역할이 컸다. 나와 맞교대하면서 근무하는 분이 2년 넘게 근무하면서 축적해 놓은 것이다. 이곳에 근무하기 전, 장기간 통신업체에 근무해서인지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빨랐고 컴퓨터 다루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록으로 자료를 남겨놓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그가 이곳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이후의 모든 사항은 자료로 정리되어 있었고, 나는 성의만 있으면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가 근무하기 이전의 자료가 부실하다는 것이다. 특히 건물이 완공될 무렵의 자료들은 정말 중요한데, 몇 사람을 거치면서 주먹구구식 인계로 일관된 듯하다. 결국 이후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뺏고서야 겨우 유지될 수밖에 없는 실정인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는 것들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건물이 이 정도라면, 더 오래된 건물이 어떨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으면 잊힌다는 진리를 잘 알기에.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는데, 나는 '보는 만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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