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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Sep 01. 2023

9. 사건의 흔적

우린 모두 같은 공간 속 다른 시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민수 형이 울었다. 남자가 쩨쩨하게 전화기를 붙잡고 울다니. 근데 그게 민수 형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거 팔각 성냥 같은 거야… 그래도 결국은 쉽게 꺼진다니까.”

민수 형은 담배를 피웠다. 손이 남자치곤 유난히 가늘고 길어 형이 담배 피우는 모습은 용납이 되곤 했었다.

5년 만에 듣는 형 목소리가 울음이라니. 한 번은 뉴스에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인터뷰하는 걸 본 적 있다.

“저도 참 난감하네요.”

20년 전 학생들과 묻은 타임캡슐을 개봉하려고 하니 의외로 타입캡슐에 빈틈이 있어 물이 들어가 대부분 물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그런 기사.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지…”

그 당혹스러운 교장 선생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어쩌면 수화기 너머 민수 형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가을이 오는 것 같네.”

민수 형은 피곤해 보였다. 꽃은 시들고 있었다. 날이 저문다.

나는 애틋함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가현은 내게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했지만 내가 꽃길을 걷기 위해선 누군가는 시들어어야 하겠구나. 우리가 술잔을 부딪힐 때마다 가현은 뭐라 뭐라 소리쳤다. 가게 안 누구라도 다 들릴 수 있을 정도로 가현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옆 테이블에 모여 있던 중년 남성들 중 한 명이 가현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칵테일 한 잔씩을 선물했다. 말끔한 양복을 입은 신사였다. 주님에게 술을 드려야 다음 사업이 잘 풀린다고 하며 웃었다. 하하하. 아주 친구분이 호쾌하시군요. 가현은 선물 받은 칵테일을 원샷한다.  

양복 입은 신사는 그 모습이 재밌다며 웃었다. 이번 사업은 잘 될 거 같군요. 친구분에게 인사 전해주세요. 사람 얼굴에도 길이 있다 하던데 그 중년의 눈주름에선 섬이 보였다.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 중년 아저씨 눈주름 속 섬 아가씨가 나긋하게 인사했다. 저는,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건 제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곳에 와서 잠시라도 편히 쉬었으면 좋겠어요. 섬 속 아가씨가 나른하게 웃는다.

“그런 곳엔 어떻게 갈 수 있으려나…”

홀로 중얼거렸다 생각했는데 민수 형과 시선이 맞았다.

“어딜 가고 싶은데?”

“아니… 뭐… 어디든. 아니. 이왕이면 섬으로.”

“섬 좋지. 아무도 없는 섬.”

가현은 이미 공짜 칵테일에 신났는지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술을 얻어 마시고 있었다. 꽤나 즐거워 보였다. 누군가가 시들어야 한다면 그게 내가 되어도 괜찮겠단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

이른 저녁에 민수형에게 전화가 왔다.

“멀리서 돌아왔는데 당연히 나와야죠. “

민수형의 전화를 받고 가현이 떠올랐다. 누구든 어서 마음의 결정을 해야 할 거야. 민수형이 그리 말한 지도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민수형과 이야기하면 나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무겁게 축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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