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권의 노트, 한 권의 책

도리스 레싱, 자기를 분해한 여자

by 응시

한 여자가 글을 쓰려고 앉는다. 그런데 쓸 수가 없다.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 많아서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유년기가 있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이 있고, 공산당 입당과 환멸이 있고, 런던으로 건너온 이민자의 고립이 있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의 피로가 있고,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다.

하나의 목소리로 쓸 수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머지가 거짓이 된다.

1962년, 레싱은 이 불가능에 대한 대답으로 황금 노트를 썼다. 이 소설의 구조는 소설이라기보다 해부에 가깝다. 주인공 안나 울프는 네 권의 노트를 쓴다. 검은 노트에는 작가로서의 자기를, 빨간 노트에는 정치적 자기를, 노란 노트에는 허구화된 자기를, 파란 노트에는 일기로서의 자기를. 하나의 나를 네 개로 찢어놓는다.

왜 찢는가.

하나로 합치면 전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나와 어머니로서의 나는 같은 문장을 쓰지 않는다. 정치적 신념을 가진 나와 남자 앞에서 무너지는 나는 같은 호흡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들을 억지로 하나의 서사에 넣으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자기 검열이 일어난다. 이 부분은 빼야겠다, 이건 보여주면 안 되겠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정리해야겠다. 레싱은 그 정리를 거부했다. 대신 분리했다.

분리는 패배가 아니었다.

검은 노트 안에서 안나는 자기 소설의 실패를 기록한다.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소설로 썼는데, 쓰고 나니 그 소설이 자기가 겪은 것과 다르다. 경험이 소설이 되는 순간 무언가가 빠진다. 그 빠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쓰는 것이 검은 노트의 역할이다.

빨간 노트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과정을 기록한다. 신념이 현실과 부딪힐 때, 신념 쪽을 고치는 것도,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정직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 자체를 기록하는 것이 빨간 노트다.

노란 노트는 소설 속의 소설이다. 안나가 쓰고 있는 허구인데, 그 허구 안의 주인공이 안나 자신과 닮아 있다. 자전적 경험을 직접 쓰면 견딜 수 없는 것을, 허구의 인물에게 건네주어 우회하는 것이다. 소설이 방패가 되는 순간.

파란 노트는 일기다. 가장 날것이다. 정리되지 않고, 구조도 없고, 날짜와 감정이 뒤섞여 있다. 다른 세 노트에서 걸러진 것들이 여기로 흘러든다.

네 권의 노트는 각각 진실의 한 면만 담는다. 어느 하나도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레싱은 이 불완전한 네 권 사이에 다섯 번째 공간을 만든다. 《자유로운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틀 소설이 네 노트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아주 짧은 황금 노트가 나타난다.

황금 노트에서 안나는 무너진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해체된다. 그런데 그 해체의 바닥에서, 네 권의 노트가 처음으로 만난다. 분리되어 있던 자기들이 겹쳐진다. 통합이 아니다. 겹침이다. 작가인 나와 어머니인 나와 연인인 나와 정치적 존재인 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레싱이 증명한 것은 이것이다.

여자가 글을 쓴다는 건 하나의 목소리를 찾는 일이 아니다. 여러 목소리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 자리는 통합의 자리가 아니라 공존의 자리다. 모순이 해소되는 곳이 아니라, 모순인 채로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황금 노트는 다섯 번째 노트가 아니다.

네 권의 노트가 겹쳐지는 순간 자체가 황금 노트다. 따로 쓸 필요가 없다. 네 개의 불완전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릴 때, 그 울림이 황금이다.

어떤 사람의 문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먼저 반응한다. "숨이 차올랐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목 안쪽이 조여왔다." 감정이 몸의 언어로 한 번 우회한다. 그다음 기억이 끼어든다. 지금 겪고 있는 일 사이로 과거의 장면이 불쑥 들어온다. 순서가 없다. 논리도 없다. 그저 지금 이 감각이 불러낸 과거가, 지금과 나란히 놓인다.

이 문장들은 정리되지 않았다.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분노고, 어떤 날은 체념이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아름다운 것에 멈춘다. 서로 모순된다. 그런데 그 모순이 거짓이 아니다.

레싱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건 네 권의 노트를 동시에 쓰고 있는 사람이라고. 정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리하면 거짓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이라고.

체화된 문장은 황금 노트의 조건이다.

몸으로 경험을 통과시킨 언어만이, 분열을 분열인 채로 안고 갈 수 있다. 정리된 감정은 에세이가 된다. 설명된 트라우마는 회고록이 된다. 그러나 감각이 겹쳐진 상태로 놓인 문장은 — 문학이 된다.

레싱은 황금 노트 서문에서 이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로 읽히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자기가 쓴 것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안의 분열과 싸우는 이야기라고.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네 권의 노트가 필요한 이유는, 세상이 여자에게 하나의 역할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이거나 작가이거나, 연인이거나 활동가이거나. "둘 다"는 허용되지 않는다. 레싱의 분리는 그 허용되지 않는 것을 문학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찢어야 했다. 찢어야 전부를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이 다시 겹쳐지는 순간, 한 줄의 금빛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