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자 안에서

실비아 플라스, 도착하지 못한 문장들

by 응시

시리즈에서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뒤라스는 《연인》을 쓰고 오래 살았다. 에르노는 《수치》를 쓰고 노벨상을 받았다. 박완서는 《나목》을 쓰고 40년을 더 썼다. 안젤루는 침묵을 깨고 미국의 목소리가 되었다. 글이 이 사람들을 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비아 플라스는 죽었다.


서른. 1963년 2월. 런던의 아파트에서. 아이들 방문 밑에 젖은 수건을 밀어 넣고, 부엌으로 가서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었다. 한 달 전에 《벨 자》가 출간되었다. 자전적 소설. 대학생 에스더가 뉴욕에서 인턴을 하고,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이야기.


플라스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써야 했던 습작이라고.


글이 그녀를 자유롭게 해 주었는가.


해주지 못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생각했다. 왜 뒤라스는 살았고, 플라스는 죽었는가. 왜 박완서는 돌아왔고, 플라스는 돌아오지 못했는가. 글쓰기의 한계 때문이라고 — 그렇게 쓰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데 다시 읽을수록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플라스에게 없었던 것. 글의 바깥에 있었어야 할 것. 도착하지 못한 것들.


벨 자란 유리 종 모양의 덮개를 말한다. 플라스는 이것을 비유로 썼다. 유리 종 안에 갇혀 있는 느낌. 바깥 세계가 보이지만 닿지 않는다. 숨은 쉴 수 있지만 공기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이 유리종이 따라온다.


플라스는 이 유리 종의 내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묘사했다. 해리의 감각, 정신병원의 시간, 약물이 의식을 잠식하는 과정, 자살 충동이 올라오는 순간의 질감. 문학사에서 우울증의 경험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쓴 글은 드물다. 그 정확함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멈추게 한다.


그런데 1963년에는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벨 자》는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간되었다. 플라스는 본명을 쓸 수 없었다. 어머니 오렐리아가 이 소설의 존재를 알면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고, 자기 경험을 이렇게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정확하게 쓴 글이 정확하게 읽힐 수 없는 상황. 가장 정직한 문장이 가짜 이름 뒤에 숨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벨 자였다.


영국 비평은 냉담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정확한 글인지 알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플라스가 벨 자의 내부를 그토록 정밀하게 그린 것은, 누군가가 그 정밀함을 알아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쓴 이 문장은 정확하다고. 이 감각은 진짜라고. 당신은 지금 벨 자 안에 있지만, 그 안에서 이만큼 정확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는 증거라고.


그 말이 도착하지 않았다.


플라스의 어머니 오렐리아는 딸이 죽은 뒤에야 《벨 자》를 제대로 읽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출간을 오랫동안 반대했다. 딸이 자기 경험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쓴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오렐리아에게 이 소설은 딸의 문학이 아니라 가족의 치부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런 글을 쓰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쓰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기 경험을 정직하게 쓴 글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거부당할 때, 글을 쓴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잃는다. 글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 대한 믿음. 내가 쓴 것이 틀렸다면, 내가 느낀 것도 틀린 것인가. 내가 아팠다고 쓴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아팠던 것 자체가 잘못인가.


플라스에게는 "당신이 쓴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정확한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한마디가 없었다.


테드 휴즈는 이미 떠나 있었다. 다른 여자와 함께. 플라스는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며 런던의 아파트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1963년 겨울, 영국 기상 관측 사상 가장 추운 겨울 중 하나였다. 수도관이 얼었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글은 혼자서 쓸 수 있다. 새벽에 아이들이 자는 사이, 부엌 테이블에서 쓸 수 있다. 플라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죽기 직전 몇 달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시를 썼다. 사후에 《에어리얼》이라는 시집으로 출간된 시들. 이 시들이 플라스의 문학적 절정이라는 데 대부분의 비평가가 동의한다.


죽기 직전에 가장 좋은 글을 썼다는 것.


이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가장 슬픈 이야기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1963년 1월, 《벨 자》가 출간되었을 때, 누군가가 플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이 소설에서 당신이 정신병원 로비를 묘사한 장면에서 오래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당신만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 그 시선이 이 소설의 진짜 힘이에요."


"에스더가 울 수 없어서 대신 다른 것을 하는 장면. 울음이 먼 곳에 잠겨 있다는 그 감각을 이렇게 정확하게 쓸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벨 자 안의 공기를 묘사한 문장. 숨은 쉴 수 있지만 공기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해리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쓸 수 없어요."


그러니까 — 문장을 짚어주는 것. 이 문장이 왜 좋은지, 이 감각이 왜 정확한지, 당신이 쓴 것이 얼마나 드문 것인지를. 비평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 글 앞에서 멈추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


그것이 있었다면.


벨 자는 깨질 수 있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죽음을 한 가지 부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라스의 우울증은 생화학적 질환이었고, 환경은 극한이었고, 시대가 여성의 고통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였다. 한마디의 인정으로 이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쓴 문장이 정확하게 읽히는 경험. 그것이 가장 추운 겨울에 가장 혼자인 사람에게 도착했다면. 적어도 그날 밤은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 나는 떨칠 수가 없다.


플라스 이후 60년이 지나서, 나는 가끔 묻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벨 자 안에서 쓰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기 경험을 정확하게 쓰고 있지만, 그 정확함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쓴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 일기처럼 흘려 적고 있지만, 그 문장들이 문학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것만은 전하고 싶다.

감옥의 도면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감옥 바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벨 자의 내부를 정확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은, 벨 자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플라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정확하게 쓸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밖에서 확인받는 것은 다른 일이다. 혼자서 아는 것은 믿음이 되기 어렵다. 누군가가 "당신이 쓴 것이 정확하다"라고 말해줄 때, 비로소 그 앎이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이 생긴다.


글은 혼자서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이 글이 되려면, 읽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글 앞에서 멈추는 사람.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는 사람. 함께 그 글 끝까지 서 있어 주는 사람.


라스에게 그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 — 60년이 지난 지금도 아프다.


이 시리즈에서 나는 무너진 뒤에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왔다. 뒤라스, 에르노, 박완서, 안젤루, 브론테, 디킨슨. 이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쓰는 것이 살아남는 것의 일부가 되었다.


플라스를 다루는 이유는,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다. 글이 되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글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자리도 있다. 그 자리에 도착해야 하는 것은 글이 아니라 사람이다.


플라스에게 도착하지 못한 것들.


정확하게 쓴 문장이 정확하게 읽히는 경험.


"이 문장에서 오래 멈추었습니다"라는 한마디.


당신의 글은 일기가 아니라 문학이라는 인정.


그리고 가장 추운 밤에 함께 서 있어 주는 사람.


나는 이제 안다. 글을 쓰는 것도 용기이지만, 그 글 앞에서 멈추어 주는 것도 — 쓰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읽는다. 멈추어야 할 문장 앞에서 멈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플라스에게 하지 못한 일을,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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