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언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생각을 몸으로 쓴 여자

by 응시

이 여자의 문장은 의미보다 먼저 도착한다.

읽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기 전에, 먼저 무언가를 느낀다. 목 안쪽이 조여 오는 감각, 손바닥에 닿는 축축한 공기, 눈을 떴는데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간의 불안. 뜻을 파악하고 나면 그 느낌은 이미 지나가 있다. 문장이 의미에 앞서서 몸에 먼저 닿는 것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이렇게 썼다.

1920년, 우크라이나.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임신 중에 폭행을 당했다. 가족은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의 병이 낫는다는 미신을 믿었다. 클라리시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낫지 않았다. 가족은 브라질로 도망쳤고, 어머니는 클라리시가 아홉 살 때 죽었다.

자기가 태어난 이유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였는데, 어머니가 죽었다. 존재의 이유가 태어나는 순간에 실패한 것이다. 이 사실을 클라리시는 평생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직접 쓴 적이 거의 없다.

클라리시의 소설에는 자전적 사실이 그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감각이 등장한다. 《G.H. 의 수난》에서 여자는 하녀의 방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하고, 그것을 으깨고, 그 하얀 액체를 입에 넣는다. 이 장면은 줄거리로 읽으면 기괴하다. 그러나 읽는 동안 독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기괴함이 아니라 — 경계의 해체다. 나와 타자 사이의 벽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사이의 벽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벽이 녹는다.

클라리시는 트라우마를 서사로 쓰지 않았다. 서사로 쓰면 인과가 생긴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고, 상처가 있고 회복이 있다. 클라리시에게 그런 순서는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원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 안에 들어와 감각이 된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몸이 아는 것.

그래서 클라리시의 문장은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

포르투갈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길 때마다 무언가가 빠진다. 빠지는 것은 의미가 아니다. 의미는 옮길 수 있다. 빠지는 것은 리듬이다. 문장이 몸 안에서 만드는 진동, 단어와 단어 사이의 침묵이 만드는 긴장, 마침표 뒤에 오는 공백의 무게. 이것들은 그 언어 안에서만 존재한다.

클라리시 자신이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쓸 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쓸 수 없다." 이건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사고보다 감각이 먼저라는 선언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손이 먼저 움직이고, 문장이 먼저 나온 뒤에야 — 아, 내가 이것을 말하고 싶었구나, 를 아는 것이다.

뒤라스가 기억을 감각의 장면으로 되살렸다면, 클라리시는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간다. 장면조차 없다. 장면 이전의 감각, 이미지가 맺히기 전의 떨림, 언어가 되기 직전의 상태. 그것을 그대로 문장에 담으려 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나라를 잃은 사람은 언어를 다르게 쓴다. 모국어가 우크라이나어이고, 자란 곳의 언어가 포르투갈어인 사람에게 — 어느 쪽도 완전한 집이 아니다. 두 언어 사이의 틈에서 자란 사람은, 언어가 세계를 완전히 담지 못한다는 것을 몸으로 안다. 그래서 언어의 한계 안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을 향해 쓴다.

어머니를 잃은 사람도 언어를 다르게 쓴다. 말로 살릴 수 없었던 사람이 있으면, 말의 효용을 의심하게 된다. 말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 서게 된다. 클라리시의 문장이 의미의 직전에서 멈추는 것은, 의미가 도달하지 못한 곳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별의 시간》에서 클라리시는 마카베아라는 여자를 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마카베아는 자기가 불행한지도 모른다. 자기가 존재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이 여자가 코카콜라를 마실 때, 비가 올 때, 라디오에서 시보가 울릴 때 — 무언가를 느낀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그 이름 없는 느낌이 마카베아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다.

클라리시는 마카베아를 통해, 언어 이전의 존재를 썼다. 설명할 수 없지만 거기 있는 것. 이해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을 쓰는 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믿은 것이다.

물은 형태가 없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 그러나 물은 존재한다. 손을 넣으면 차갑고, 마시면 목이 적셔지고, 빠지면 숨이 막힌다. 형태 없이도 몸은 안다.

클라리시의 문장이 물이다. 읽는 사람의 몸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마다 다른 형태가 된다. 그래서 같은 문장을 두 번 읽으면 다르게 느껴진다. 달라진 건 문장이 아니라 읽는 몸이다.

생각을 몸으로 쓴다는 것은 이런 일이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일으키는 것. 독자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게 하는 것. 그 움직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다만 물을 흘려보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