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거부가 언어가 될 때
영혜는 어느 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유를 묻는다. 꿈을 꾸었다고 한다. 숲에서 피투성이 얼굴들을 보았다고. 그것이 전부다.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고, 시댁은 분노하고, 아버지는 억지로 고기를 입에 넣는다. 영혜는 뱉는다. 그리고 손목을 긋는다.
《채식주의자》는 이 장면 이후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영혜의 목소리는 1부의 짧은 내면 독백 이후, 거의 사라진다. 2부와 3부에서 영혜는 타인의 눈으로만 보인다. 형부의 눈으로, 언니의 눈으로. 영혜 자신은 점점 말하지 않는다. 점점 먹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한다.
한강은 왜 영혜에게서 목소리를 빼앗았을까.
빼앗은 것이 아니다. 영혜에게는 처음부터 언어가 없었다.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이 여자에게 주어진 언어는 없었다. "싫다"가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자란 사람에게, 말은 도구가 아니다. 말은 실패의 기록이다. 말해도 바뀌지 않았다. 말해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선택은 하나다. 몸으로 말하는 것.
먹지 않는 것은 언어다.
이것을 의학은 거식증이라 부르고, 가족은 고집이라 부르고, 사회는 비정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강은 이 거부를 병으로 쓰지 않았다. 영혜의 거부는 진단명이 아니라 문장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먹지 않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것 — 자기 몸 — 을 통해 저항하는 것이다.
한강 자신의 글쓰기가 이 구조와 닮아 있다.
한강의 문장은 조용하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분노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이미지가 놓인다. 피투성이 얼굴, 몽골반점 위에 그려진 꽃, 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이 이미지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왜 이 장면이 여기 있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한강은 말하지 않는다. 독자의 몸이 알아채도록 놓아둔다.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광주를 쓴다. 5·18.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집단 트라우마 중 하나를.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한강은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죽은 소년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죽은 뒤에도 떠나지 못하는 혼이 친구의 시체 곁에 서 있다. 덮어줄 천을 찾는다. 찾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광주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 감각한다. 시체의 냄새, 관을 짜는 나무의 질감, 군화 소리.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 안에 있었던 몸의 기억이 전달된다.
한강에게 글쓰기는 말하는 행위가 아니다. 보여주는 행위도 아니다. 건네는 행위다. 자기가 본 것을 — 그것이 너무 무거워서 혼자 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 독자의 몸에 건네는 것이다. 독자가 그것을 받을지, 받고 나서 어떻게 할지는 독자의 일이다.
영혜가 먹지 않은 것처럼, 한강도 무언가를 거부한다. 설명을 거부한다. 요약을 거부한다.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한다. 대답하면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말로 환원하면 사라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2024년, 한강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수상 소식을 들은 뒤 한강이 한 일은 조용히 두부를 사 먹은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가 한강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가장 큰 인정 앞에서, 가장 작은 행위로 응답하는 것. 말의 크기를 줄이고, 몸의 감각으로 돌아가는 것.
박완서가 침묵 속에서 글을 익혔다면, 한강은 거부 속에서 글을 벼렸다.
거부는 부정이 아니다. 거부는 선택이다.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은,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영혜가 고기를 거부한 것은 죽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피 묻은 세계의 일부이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한강이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게으른 것이 아니다. 설명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정확한 거부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그 결정 안에, 쓰는 사람의 전부가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