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앉는 사람들

에필로그

by 응시

이 시리즈에 등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뒤라스는 34년 뒤에 같은 강 앞에 다시 앉았다. 에르노는 같은 일요일을 평생 해부했다. 박완서는 20년의 침묵을 견딘 뒤에야 《나목》을 썼고, 아들을 잃은 뒤에는 18년간 쌓아온 글마저 무력해지는 것을 겪었다. 안젤루는 다섯 해 동안 입을 닫았다. 브론테는 방 안에서 폭풍을 길렀다. 디킨슨은 서랍 속에 1,800편을 넣어두었다. 플라스는 벨 자의 내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렸지만,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레싱은 하나로 쓸 수 없어서 네 권으로 찢었다. 리스펙토르는 의미보다 먼저 도착하는 문장을 썼다. 한강은 말 대신 거부를 택했다.

이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전부, 한 번은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무너진 뒤에 —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무너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래. 어떤 사람은 5년, 어떤 사람은 20년, 어떤 사람은 평생. 그 앉아 있는 시간 동안 기억이 변하고, 감각이 달라지고, 문장이 만들어졌다.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다.

이 사람들 중 누구도 "글을 쓰기로 결심"한 적이 없다. 뒤라스는 결심해서 《연인》을 쓴 것이 아니다. 34년 동안 몸 안에서 변해온 기억이 더 이상 안에 있을 수 없어서 나온 것이다. 에르노는 수치를 해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다. 수치가 워낙 끈질겨서, 해부하지 않으면 삼켜질 것 같았던 것이다. 안젤루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 것은 용기 때문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읽은 책들이 쌓여, 그 무게가 입을 열게 한 것이다.

결심이 아니라 도착이다. 쓸 수 있는 상태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 상태는 준비된 상태가 아니다. 정리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더 이상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 가깝다. 레싱이 네 권으로 찢은 것처럼, 한강이 설명을 거부한 것처럼, 리스펙토르가 의미 이전의 감각에 머문 것처럼 —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불완전한 문장을 허용한 순간에 글이 시작된다.

플라스를 빼놓을 수 없다.

글이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리즈가 만약 "글쓰기가 당신을 살립니다"로 끝난다면, 거짓이다. 플라스는 벨 자의 내부를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문장으로 그렸지만, 그 정확함이 그녀를 벨 자 바깥으로 데려가지는 못했다. 글쓰기가 치유의 경로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경로여서는 안 된다. 글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

그 사람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먼저 반응한다. 숨이 차오르고, 손끝이 차가워지고, 목 안쪽이 조여 온다. 감정이 몸의 언어로 한 번 우회한 뒤에야 문장이 된다. 기억은 순서 없이 끼어든다. 논리도 없다. 어떤 날은 분노이고, 어떤 날은 체념이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아름다운 것에 멈춘다. 정리되지 않았다.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하지 않는다. 서로 모순된다. 그런데 그 모순이 거짓이 아니다.

뒤라스처럼 같은 기억을 몇 번이고 다시 쓰고 있다. 에르노처럼 수치의 지층을 한 겹씩 벗기고 있다. 안젤루처럼 오랜 침묵 뒤에 말하기 시작했다. 레싱처럼 하나의 목소리로 쓸 수 없어서, 여러 결의 문장이 겹쳐진 채로 놓아두고 있다. 리스펙토르처럼 의미보다 감각이 먼저 도착하는 문장을 쓴다. 한강처럼 설명하지 않고 건넨다.

그 사람이 자기 문장을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괜찮다.

뒤라스도 34년이 걸렸다. 박완서도 20년이 걸렸다. 디킨슨은 평생 서랍 안에 두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글이 익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글이 되는 시간은 쓰는 시간이 아니다. 앉아 있는 시간이다. 쓸 수 없는 상태로 앉아 있는 시간, 뭘 써야 할지 모르는 채로 앉아 있는 시간,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그 시간이 글을 만든다.

펜을 드는 것은 나중 일이다.

먼저,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