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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많이 Apr 07. 2021

유리창

유리창 너머로 찰나의 낭만을 소비합니다.

언젠가 한강이 보이는 서울 한 복판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할 테지만, 그게 어디든 유리 창문이 큰 집에 살아보는 건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일 중 하나다. 나는 통창 혹은 통유리라고도 하는 -잘라지지 않고 큼직하고 시원하게 밖이 내다 보이는- 유리창을 사랑한다. 검색창에 통창만 쳐도 '통창 카페'라는 연관 검색어가 뜨는 걸 보면 큰 유리창을 좋아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큰 유리창으로 느낄 수 있는 이른 아침 어렴풋이 슬쩍 들어오는 신선한 햇살, 한낮의 건조한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들, 어슴푸레한 초저녁 일렁이는 자동차의 불빛은 내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만든다. 그 장면의 조각들은 퍽퍽한 일상에서 특별한 감동을 주며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다. 해야 하는 일이 무더기로 쌓인 하루하루를 보내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유리창을 잠깐 넋 놓고 바라보면 그 순간만큼은 찰나의 낭만에 푹 담가질 수 있다. 아주 짧게 소비하는 낭만이지만 그게 어디인가.


독립할 집을 고를 때 오피스텔을 고집한 것도 결국 창문이었다. 빌라에 살면 더 저렴한 가격에 넓은 공간을 쓸 수 있었지만, 머리에서 어깨 즈음까지만 빼꼼히 보이는 창문이 견딜 수 없었다. 한 번 방문하고 재방문을 불렀던 가게들도 하나같이 큰 유리창을 갖고 있다. 초저녁 노을 지는 햇살을 옆으로 쬐며 향기로운 레몬과 바질 향을 맡을 수 있는 합정의 '오스테리아 샘킴', 초록 초록한 나무 사이로 슬쩍 고즈넉한 화성을 볼 수 있는 수원의 '정지영 커피 로스터즈 장안문점', 통 창이 바로 문이라 햇살을 여과 없이 쬘 수 있는 선유도 '내일 식당'이 그렇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인테리어가 근사하지만 큰 유리창이 없는 가게들은 이런 '햇살 맛집'을 이길 수 없다.


내가 직접 원하는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요리하는 부엌엔 꼭 가로로 긴 유리창이 나있었으면 한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요리하는 행위 자체를 영화로 만들어 줄테니까. (서촌의 '보따리상점' 창문 옆 싱크대가 나의 드림 키친이다.) 그리고 거실에도 비스듬한 방향으로 햇살을 받아주는 통창이 있어, 큰 테이블을 두고 책도 읽고 노트북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도 집 근처 수많은 카페 중에서 제일 큰 통창을 보유한 스타벅스로 와서 길게 뻗은 유리창 옆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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