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내 삶을 완전히 바꿨다.” “영화가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준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건 불가능한 일이며 아마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하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나에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영화니까. 영화가 어느 날 사라져 버려도 그들은 살아갈 힘을 찾지 않을까?
지난주 토요일에 독립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봤다. 엔딩의 여운을 느끼며 극장을 나서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다. 집에 틀어박혀서는 몸을 일으키는 잠깐의 노력도 버거워하는 하루를 보내다가 저녁 7시에 영화를 봐야겠다고 집을 나왔다. 고등학교 때 별명이 ‘린다’였던 나는 이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 언젠가는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20주년 기념 리마스터링으로 지금 극장에 걸려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치 숙제처럼 마음에 떠올랐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날에 가장 쉬운 숙제를 해치우기로 했다.
영화를 보기 전 알고 있는 정보는 <린다 린다 린다>가 걸즈 밴드 물의 시초격이라는 말 정도였다. 포스터 또한 ‘청춘’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되는 작품의 느낌이었다. (같은 이유로 청춘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청춘의 이야기에 쉽게 매료되는 편이라, 수백 번은 본 것 같은 클리셰의 향연이어도 나름의 특별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그저 영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이 영화를 맞이하기에 완벽한 준비 자세였던 것 같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좋을 때 오는 부드러운 반전의 효과가 굉장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10대’, ‘밴드’라는 특징을 빼면 한 줄도 쓸 수 없는 시놉시스임에도, 꼭 10대가 아니어도 되고, 밴드가 아니어도 되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이런 ‘주제’를 둘러싸고 남은 여백의 아름다움이 나를 감싸안는 듯했다.
주인공들은 수시 때때로 멍했다. 공연이 코앞인데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듯이 공허한 적막을 보내곤 한다. 그러다 누군가 이제 시작하자는 얘기를 꺼내면 다시 왕왕 울리는 밴드의 소음이 들린다. 스튜디오를 찾아 버스를 타고 갈 때에도 적당히 떨어져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은 무언가를 특별히 의미하지 않았으나, 쉼 없이 지나가는 풍경의 편안함을 주었다.
매일 학교에 모이는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보이지 않는다. 집에 있을 때의 모습이 나오는 잠깐 잠깐의 컷, 그리고 클로즈업된 표정과 학교 밖의 인물과의 연결고리 같은 단서들에서 그 사람을 추측할 뿐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적당한 혼합, 무지에서 오는 이해가 있었다. 그래서 클라이맥스인 공연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점점 멤버들로부터 멀어져서 열광적인 무대의 한참 뒤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 텅 빈 교실, 비 내리는 건물 사이 복도 등을 비추었다. 공연자가 지각해도 야유하는 이 하나 없는 느슨한 학교 공연에 ‘파란 마음’ 밴드의 완벽하지 않은 연주가 시작된다. 밴드 이름도 즉석에서 지었다. 어쩌면 이건 극의 줄거리가 되기에는 너무 민둥민둥한 것일지도 모른다. 먼 훗날의 인물들은 자신이 무슨 악기를 맡았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공연을 했다. 외로움 후에 설렘이 있었고, 어색함 뒤에 소속감이 있었고, 수줍음 속에 당당함이 있었다. 설령 그 하나하나가 그토록 중요하지는 않을지언정, 공연을 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감정이 삶에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또 한 번의 끝나지 않는 졸업식을 치르게 된다. 흐릿해진 과거의 나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이별의 서글픔을, 우리는 결코 마무리할 수 없을 것이다.
<린다 린다 린다>가 보여준 이 담담한 아름다움은 나를 살고 싶게 만들었다. 그 전에 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얼마간 좀 더 힘차게 몸을 일으키게 했다. 무언가를 떠올리며 웃게 했고, 달리 말해 내가 받은 사랑을 해소할 수 있게 했다. 지난 토요일 8시 전까지의 나는 삶이 내게 주는 과분한 것들 속에서 그저 멍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린다 린다 린다>는 심벌 소리를 울리며 삶이 그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흔들며 깨웠다.
영화가 삶에 깊게 들어오기 위해 중요한 것은 구성적 완성도나 교훈적 메시지가 아니라, 어떤 영화와 만났을 때 나 자신의 상태란 걸 깨닫는다. 소중한 게 생기는 과정은 나와 우연한 외부의 것 사이의 공명이다. 영화가 삶을 바꾼다는 말도 그러한 맥락을 생략한 진실인 것 같다.
나는 이틀 뒤에 같은 영화관의 같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