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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May 31. 202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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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서울에 비해 주차 걱정이 덜합니다.

이곳저곳 길가에 적당히 차를 댈만한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주차공간을 두고 매일 우리 가게 앞에 하루 종일 차를 대고 출근하는 이가 있습니다

아침에 주차하고 저녁에 퇴근하니 영업장 앞을 종일 혼자 다 쓰는 거죠.

뭐라 하고 싶지만 말은 못 하고 혼자 속만 썩입니다.

아내는 밖에 차 세우는 일 신경도 쓰지 말라 하는데, 좁은 속으론 사뭇 괘씸합니다.

오늘도 차를 주차시키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모습을 보며 막 화가 납니다

그러다 문득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싯 구절이 생각납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을 망치는 몰염치도 있는데,

왕궁을 휘젓는 뻔뻔함도 있는데,

그곳엔 한마디도 못하며 나는 그저 '50원짜리 기름 많은 갈비'같은 주차를 보고 분개합니다.

시를 꺼내 다시 읽어보며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50원만도 못한 내 분개가 우스워집니다.

절정 위에서 잠시 비켜서서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나는,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정작 분개해야 할 세상을 등지고 서있는 모래알 같은 오늘 아침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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