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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Oct 04. 2021

넌 뭐가 그렇게 즐거워?

돌멩이를 보석이라고 부르기


넌 뭐가 그렇게 즐거워?


 밝고 잘 웃는 성격이라 인상이 좋다는 평을 들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고 '뭐가 그리 좋은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대외적인 이미지와 별개로, 삶은 고달프고 힘들다는 게 내 모든 가치관의 전제다. 점심 메뉴부터 내일 입을 옷까지 매순간 선택을 해야하고, 선택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모자라 그 결과에 책임까지 져야 하는 게 삶이니까. 그나마 점심 메뉴처럼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다행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신체적 조건처럼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들과 지지고 볶으며 산다. 나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나 엄마의 부재를 거북이 등껍질처럼 지고 매일을 '버틴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믿기에 개의치 않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이 목격하는 나의 밝은 모습이 가짜는 아니다. 끙끙대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느낀다.

사당에서 낙성대 가는 길

산책의 이유


 8월 중순 쯤 김경일 심리학 박사의 <적정한 삶>을 읽었다. 몸에 밴 행동이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을 뇌 과학과 연결해 쉽게 풀어놓은 것이 인상적인 책이었는데, 불안에 대한 설명 중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실 걷다 보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 감정은 정돈되고 논리는 연결되며 생각은 차분해진다.
...
실제로 뇌 사진을 찍어 봐도 발뒤꿈치가 지면에 닿을수록 뇌 속 편도체 활동은 진정된다. 편도체는 불안감, 화,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만들어 내는 영역이다. 편도체 옆에는 '해마'라는 영역이 존재하는데 편도체와 해마는 서로 길항 작용을 한다. 편도체의 활동이 클 때 해마는 위축되고, 편도체가 움츠러들면 해마는 확장된다. 그런데 이 해마가 담당하고 있는 활동이 바로 새로운 생각과 기분 전환이다.

<적정한 삶>, p.93-94p

 우울하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집 밖을 나가 무작정 걷는 건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저 바깥 바람을 쐬면 기분이 좀 나아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뇌 속에 있는 편도체를 진정시키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다니 신기했다.

집 근처 공원 가는 길

당신은 산책을 하고 있나요?


 몇 일 뒤 정기구독을 하고 있는 '컨셉진'에서 잡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산책을 하고 있나요?>  93호 잡지의 주제는 공교롭게도 산책이었다. '얼마 전에 다른 책에서도 산책 이야기가 나왔는데!' 신나서 컨셉진을 펼쳐보니 나처럼 산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게 아닌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는 일이 산책과 글쓰기라고 말하는 오은 시인부터, 일상을 변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산책에서 찾는다는 산책자 김철민씨까지. 컨셉진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랑 산책 갈래요?


 한참 컨셉진을 읽고 있는데 친한 회사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갈래요?" 편한 동료와 시간을 보낼 생각에 신이 나기도 했지만, 서로 전혀 상관이 없던 두 권의 책과 한 명의 사람이 산책이라는 줄에 나란히 꿰어지는 걸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나만의 구슬목걸이를 만드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할까.


 누군가는 힘이 들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스스로에게 비싼 옷이나 가방을 선물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난한 쪽에 속하는 나는 누가 봐도 반짝이는 물건을 구매할 용기도, 능력도 없다. 그래서 대신, 출근길이나 산책로에서 돌멩이들을 주워다 뽀득뽀득 닦고 깎아내 보석이라 부르며 산다. 돌멩이는 지천에 널렸으니, 더 많은 돌멩이를 보석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삶이 좀 더 쉽게 반짝이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나에게만 보석인 것들은, 지금껏 나를 웃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보석이 될 만한 돌멩이들을 찾아 산책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산다. 삶이 고달프다고 해서 고달픈 마음으로 살아야하는 건 아니라는 걸, 길가의 돌멩이들을 줍다가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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