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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감 Jan 29. 2021

<고요한 사건>_ 백수린:보잘 것 없는

4th episode  from 《여름의 빌라》


한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우리가 소고기야? 왜 등급을 매겨"

등급이 좋을수록 비싸고 잘 먹잖아요. 
저는 등급이 안 좋은 소고기가 되기로 결심을 했어요. 

먹히지 않겠다는 거죠. 

- '학교에서 밝은 척 가면을 쓰는 이유' , 유튜브 @씨리얼 


세상엔 '생각보다' 잘 사는 사람이 많고 '생각보다' 가난한 사람도 많다. 가난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짓누르는 무게는 크다. 그건 일종의 족쇄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선택지라는 것 자체를 완전히 지워버리니까. 나는 누군가에 비하면 풍족하고, 누군가에 비하면 가난한 삶을 살았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 상대적인 위치를 부여받으며, 매순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며 안도하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보며 질투한다. 돈이라는 건 고작 종이장이나 쇳덩어리에 불과하면서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학생일 때의 나는 적어도 절망을 가르치는 어른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가난'을 앞장세워 누군가의 가능성을 꺾어버리는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가난에 인생의 발목을 잡히는 이들이 적어졌으면 했다.


어느새 나는 이십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절망을 가르치지 않는 어른'이라고 말이다.


가난을 인질삼아 아이들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어른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에 발목잡히지 않도록 일조하는 어른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 살기에 바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무관심한 방관자. 아니, 관여하지 않았으니 애초에 방관자라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저 아이의 인터뷰를 보며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백수린의 소설 <고요한 사건>은 '가난'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십대 소녀의 시선으로 그린다. '나'의 부모님은 재개발을 노리고 일부러 서울의 달동네로 이사를 왔다. '나'는 넓고 깨끗한 아파트를 버리고 굳이 낡은 달동네로 이사온 부모님의 선택이 싫기만 하다. '나'는 점차 동네에 적응하고 학교에 다니지만 옆 동네 아파트 출신 아이들과 달동네 출신 아이들 사이에 놓인 벽을 실감한다. 사는 지역은 부모의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고 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세습된다. 학교에서도 보이지 않는 빈부 격차가 아이들을 가른다. '나'는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아파트 아이들과 어울리는 유일한 달동네 출신의 아이지만, 언제나 불편하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반 아이들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 보였지만, 물리적 성질이 달라 합류 지점을 지난 뒤에도 각자의 흰빛과 검은빛을 유지하며 나란히 흐른다는 남아메리카의 두 강줄기처럼, 서로 섞이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내겐 공부를 잘하는 재능이 있었고, 그것이 전학 간 뒤 처음 본 중간고사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에 나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 p.82, <고요한 사건>, 백수린 


시간이 흘러 재개발 소식이 조금씩 들려왔다. 새로 들어설 아파트에 입주할 자금이 없는 사람들, 달동네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은 하나 둘 동네를 떠났다. '나'의 친구 해지의 가족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동네에선 다툼이 잦아졌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찬성하는 사람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이었다. 삐그덕거리며 외줄타기를 하던 갈등이 폭발한 계기는 고양이의 죽음이었다. 재개발을 반대하던 고양이 아저씨(그는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후 동네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곤했다)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고양이 밥에 약을 섞었다. 눈 앞에 떨어진 큰 돈 앞에서 길고양이의 생명 같은 건 발에 차이는 쓰레기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아빠, 아빠. 고양이 아저씨가 맞고 있어요." 
그뒤로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울면서 아버지에게 내게 목격한 것을 설명한 것 같다. 아저씨의 얼굴이 어떻게 부어있었는지. 그의 몸이 발길질에 어떻게 둥그렇게 말렸다가 다시 가까스로 펴졌는지. 그리고 피가, 피가 어떻게 흘러내렸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다 들으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을 부르고, 사람들을 불러서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줄 거라고.

- p.101, <고요한 사건>, 백수린 


고양이 아저씨는 고양이 밥에 약은 섞은 이들에게 자꾸만 달려들었다. 얻어 맞고 피가 터지고 허리가 꺾여도, 발음이 부정확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자꾸만 달려들었다. 아마 그건 악에 받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고양이들을 지키기 위해 재개발에 반대했던 아저씨는 자본의 흐름에 짓이겨지던 고양이의 목숨이, 그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혹은 고양이처럼 짓이겨질 누군가의 삶이 억울하고 분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에게 더 충격적이었던 건 고양이 아저씨가 맞고 있던 장면이 아니라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가장 믿고 의지하던 어른은 누군가 짓이겨지던 풍경을 외면했다. 갈등에 엮이는 것이 불편했기에, 재개발을 반대하는 고양이 아저씨를 도울 수는 없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당연히 사건을 수습할 것이라 여기던 아버지의 외면을 보며 '나'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 p.104, 백수린, <고요한 사건> 


고양이의 사체.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죽음. '나'는 그 아이를 묻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어떻게 묻어야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떡하든 한 생명의 마지막을 존중하겠다는 마음은 무의식중에 학습된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말의 양심은 소복히 내린 눈에 의해 사뿐히 덮여버렸다. 아름답게 창밖의 풍경을 수놓았던 흰 눈은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던 고양이의 사체 위에, 고양이 아저씨가 흘린 핏자국 위에, 고양이를 죽이고 아저씨를 때렸던 사람들의 지붕 위에, 사건을 외면했던 동네 사람들의 지붕 위에도 소복히 쌓였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든 건 착각이었다는 듯.


그 눈의 속삭임 앞에서 '나'는 고양이의 피를, 아버지의 외면이 줬던 충격을, 고양이 아저씨의 몸부림을 잊었다. 고양이 아저씨를 외면하던 아버지처럼 '문고리를 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 것없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끔, 그곳을 지날 때가 있다. 예전에 굴다리가 있었고 창 없는 방석들이 즐비하던 거리는 이제 흔적도 없이 고층건물로 뒤덮여 있다. 우리 가족은 포클레인이 폐가들을 부수기 전에 이사를 했고, 그후 한동안 나는 그 지역에 다시 가지 않았다. 고양이 아저씨처럼 종국엔 쫓기듯 떠나간 그 동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쩌다 버스를 환승하기 위해, 이제는 공항철도가 놓인 그 거리를 걷다보면 그 시절의 어떤 장면들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이를 테면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그날의 기억 같은 것.  

- p.98, <고요한 사건>, 백수린 


매일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외면하던 풍경의 조각을 발견하곤 한다. 이를 테면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그날의 기억이라든가, 어느 학생의 먹히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 그 조각을 마주할 때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냐고. 문고리를 잡은 채 나아가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는 애매하고 보잘 것 없는 어른이 되어버리진 않았냐고. 순간 순간 무서워진다. 언젠가는 이 애매한 어른 조차 되지 못할까봐. 어느 새 문고리를 놓아버리고 창밖의 풍경을 외면한 채 안주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될까봐.


다시 한번 생각한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 
아이들에게 절망을 가르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출처] '학교에서 밝은 척 가면을 쓰는 이유' , 유튜브 @씨리얼

* 단편, Fragment 시리즈는 하나의 책을 순차적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습니다.

* 이 시리즈는  흘러 들어오는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내보내는 일종의 기록입니다. 

* 우리가 맞닿은 현실을 이야기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다양하게 추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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