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병'일까
'펀드'라는 것은 은근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펀드 자체만 놓고 보면, 펀드를 파는 판매사가 있고, 펀드를 운용하는 운용사가 있다. 그리고 3자의 입장에서 펀드의 재산을 맡아주는 수탁사,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시장 가격으로 펀드의 가치를 평가해 주는 평가사 등이 하나의 펀드를 구성하는 데 연관된 조직이다. 그리고 그 펀드에 돈을 맡기는 고객, 그 펀드와 거래를 하는 중개사 등 직간접적으로 대단히 많은 조직이 펀드 하나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붙어있다.
그렇기에 천지분간을 하지 못하던 신입이라는 딱지를 떼고 나서 운용사의 운용파트에서 제일 먼저 배웠던 것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갑이 을에게 을처럼 하는 것은 단지 조직의 위신이나 개인의 자존심 문제이지만, 갑(예를 들면 고객)에게 갑처럼 구는 것은 회사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사안으로 발전할 소지가 농후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두에게 겸손하게 하면 될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도 않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고.
그렇다면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은 갑일까? 을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된다. 과거에는 갑인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언급한 많은 조직들 중 펀드매니저는 운용사에 속해있는 직원이고, 펀드의 재산을 운용하는 의사결정을 하는 역할을 한다. 즉, 뭘 사고 팔지 정하는 위치이다. 동시에 선택한 종목을 누구랑 사고 팔지도 자연스럽게도 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거래 수수료, 즉 수익을 누구에게 안겨줄지 정할 수 있었다. 갑이 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과거형임을 주목하자. 현재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마찬가지로 운용사에 소속된 트레이더가 거래상대방(브로커)을 정한다. 펀드매니저는 거래할 종목과 수량, 주문조건 등만 정한다. 갑의 위치를 잃었다.
사실 인과응보에 가깝다. 처음 입사했을 때 전설처럼 전해 들었던 옛 선배들의 무용담과 더불어 소위 '갑질'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들으면 '저래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한 것도 많았다. 김영란법 비슷한 것도 없었으니, 많은 브로커들이 매니저들에게 영업하러 다녔고, 역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변하고, 불미스러운 사건 및 사고가 터져 나왔다. 이에 감독당국이 대대적인 손보기에 나섰고, 펀드매니저는 가지고 있었던 작은 권력이나마 트레이더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제 거래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브로커 입장에서 볼 때, 운용사 직원 중 주된 영업의 대상은 트레이더가 되었다. 그럼 과거와 같은 일이 트레이더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이는 권한이 나눠지면서 좀 완화된 것 같다. 종목 선택과 매매 횟수 등을 정하는 것은 여전히 펀드매니저이고, 운용 지시를 수행하는 주체는 트레이더다. 한족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힘을 쓸 수 없다. 펀드매니저나 트레이더가 브로커와의 거래를 혼자의 힘으로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균형과 견제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또한 펀드의 수익 창출에 자료제공 등으로 기여한 브로커에게 보다 많은 거래량이 갈 수 있도록 거래상대방 평가 프로세스 등이 만들어졌다. 현재 펀드매니저는 반쪽짜리 갑이다.
펀드매니저는 철저한 을이기도 하다. 고객이 있기 때문이다. 기관 자금을 받아서 운용하는 경우에는 해당 기관의 자금을 집행하는 실무자, 일반 개인 고객이 가입하는 펀드를 운용하는 경우, 개인고객에게 펀드를 판매하는 판매사의 판매 관련 실무자가 고객이자 갑이 된다. 불특정 다수이자 펀드의 지분이 적은 일반 소수 개인은 명목상 갑이나, 실제로는 갑의 범위에서 제외한다. 펀드가 크게 잘못되어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 한, 개별 개인 고객에게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안타깝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특히 금융시장에서는 돈의 많고 적음이 곧 발언권의 무게이다.
펀드매니저의 존재이유는 고객의 자산을 적법한 방법으로 잘 운용해서 수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운용 기법을 활용하는데, 펀드매니저들마다 성향과 소위 주특기가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방법과 시장의 흐름이 맞아가는 주기 역시 다 다르다. 어떤 매니저는 데일리로 성과를 조금씩 내기도 하고, 어떤 매니저는 보다 긴 시각에서의 운용을 지양하기도 한다.
고객은 끊임없이 성과를 측정하고 체크하며, 다른 매니저들과 비교한다. 당연하다. 개인투자도 매일매일 자기가 투자한 종목의 시세를 점검하는데, 대규모 자금을 맡긴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어진 일을 안 하는 셈이다. 그리고 고객은 주기적으로 평가를 해서 펀드매니저를 계속 유지할지 제외할지 정해야 한다. 여기서 펀드매니저가 철저한 을이 된다.
만약 어떤 매니저가 저가 매수를 지속하면서 두 달간 버텨왔고 이제 수익으로의 전환이 기대된다. 하지만 한 달 성과가 나빠서 맡기 자금을 일부 회수할 계획이라고 고객이 통보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펀드매니저는 근거자료를 잔뜩 작성해서 전화를 하고, 직접 찾아가서 어떠한 목적으로 이렇게 해왔는지, 왜 지금 자금 회수를 하면 좋지 않은지 등등을 확신에 차고 절절한 마음가짐으로 설명해야 한다. 운용사는 고객이 맡기 자금의 규모에 연관된 수수료가 수입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철저한 을이 되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믿어달라고 해야 한다.
이런 일도 있다. 고객의 목적에 맞게 펀드를 운용했지만, 운용 기간 중에 시장 상황이 크게 변해버렸다. 고객의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대개 고객과 운용 방식을 변경할지를 협의한다. 추가적인 손실을 막고 일발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사전에 위험과 수익에 대해 고지하고 동의를 구한다. 그리고 시도해서 잘되면 모두가 기쁘게 끝나지만,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면 이제 펀드매니저는 만고의 역적이 된다. 잘못된 제안을 제시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고객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린다. 복구방안을 들고 가지만 신뢰를 잃었으니 유구무언이다. 그런 펀드매니저에게 좋은 얘기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체로 다음 기회에 보자, 일단 자금은 회수하지만 그동안 고생했다 등등의 얘기가 오간다. 그러면 더 죄송스러워하며 필요한 자료라도 있으시면 언제든지 요청 달라고 하면서 무료봉사 의지를 보이며 물러나는 게 흔한 풍경이다. 하지만 고성과 분노가 휩싸인 질책이 날아드는 때도 있다. 그러면 이제 온갖 생각이 다 든다. 같이 동의해 놓고선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부터, 나에게 월급 주는 사람은 당신이 아닐 텐데 등등.. 하지만 조용히 듣고 와야 한다. 고객에게는 철저한 을이다.
그리고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회사에서의 위치다. 성과 좋고 고객의 자금이 마구 유입될 때는 세상 편한 갑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대개 병에 해당하지 않을까. 운용사에서 고객과의 주요 접점인 마케터에게 펀드매니저는 소중한 소통창구다. 그들이 힘써서 날 보호해 줄 수도, 날 내팽개치고 원수가 될 수도 있다. 내부 영업을 해야 하는 이유다. 그 외에도 내 운용방식을 믿고 지지해 줄 직장상사에게도 병이 되고, 내 거래를 잘 처리해 줄 트레이더에게도 병이 된다. 심지어 나의 평판을 위해 나에게 을의 입장인 브로커에게도 잘해야 한다. 평판 관련해서는 다음에 길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느 영역에서나 빛나는 별이 있기도 하고, 열심히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는 이들도 있다. 여의도 바닥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어는 미디어일 뿐. 여기도 또 다른 전쟁터이다.
[표지그림 : Unsplash의 Ruthson Zimmerman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