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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hole Jun 30. 2023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여의도 점심 전투기

  여러분은 점심을 언제 어디서 먹는가?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전반적인 점심시간은 원래 12시였다. 하지만 여의도 직장인들의 점심이 좀 다른 점이 있다.


  첫 번째는 빠르고 긴 점심시간이다. 처음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분명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몇 년 전에도 12시가 여의도 점심식사 시작 시각은 아니고 그보다 조금 일찍 밥을 먹으러 나가는 분위기였다. 11시 40분이 좀 지나서 하나 둘 식사를 위해 자리를 떴고 50분쯤이면 거의 다 나가고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식당에도 11시 반은 지나서야 슬슬 자리도 차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점심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각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11시 50분 전에 우르르 나가던 사람들이 11시 40분이 되면 엘리베이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또 몇 년 지나고 나서는 11시 반에 식당 앞에서 점심 파트너와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11시 15분 정도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20분 정도면 식당 줄을 서야 한다. 아예 공식적인 점심시간은 이제 1시간 반으로 정해졌고, 퇴근시간은 30분 늦춰졌다. 아무도 여기에는 토를 달 수 없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일찍 나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다른 데도 많지 않나 싶지만, 여의도만큼 제한된 지역 안에 사무용 초고층 건물이 밀집된 곳은 보지 못했다. 그 건물들에 근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에 점심을 먹고자 하니 조금 맛이 괜찮다 싶은 곳에는 줄이 금세 길어져 버린다. 생각해 보자. 한 20층쯤에 근무하고 있는데, 점심 먹으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니 이미 우리 층 사람들이 바글바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이미 사람들이 가득가득. 그럼 일단 타고 보자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는 사람도 부지기수. 간신히 내려가 식당 앞에 도착하니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과연 오늘 점심을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른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다 보니 어찌어찌 눈치를 보며 조금씩 일찍 출발하는 분위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고, 결국엔 모두의 시간이 앞당겨지는 현상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모든 여의도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모습은 여의도역 중심으로 IFC와 더현대를 포함하고 인도네시아 대사관 전까지 아우르는 업무지구, 소위 동여의도 업무지구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같은 여의도라 하더라도, 여의도공원에서 국회의사당 방면의 업무지구, 서여의도는 조금 모습이 다르다. 증권사 및 관련 투자기관 중심인 동여의도와는 다르게 정당과 그 관련 기관, 산업은행과 같은 국책기관, 방송국 등이 주로 위치해 있고, 초고층 빌딩도 거의 동여의도에 모여 있어, 서여의도가 상대적으로 한산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다소 분위기가 다른 서여의도는 그래도 아직 점심시간이 동여의도 보다는 늦다. 날씨가 좋을 때 서여의도로 점심 원정 오는 동여의도 사람들은 그래도 여긴 한적하다며 사뭇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두 번째는 여의도 직장인(주로 동여의도의 소위 증권맨)들은 적지 않은 숫자가 외부 사람, 즉 회사 외 또는 부서 외 사람들과 점심을 먹는 일이 매우 많다. 여의도는 인맥이 촘촘하게 형성된 사회다. 어떤 상품을 통해 비즈니스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주식만 거래한다면 HTS의 매매창처럼 사람을 통할 일이 별로 없겠지만, 채권, 부동산, 대체상품, 징외파생상품 등 아직도 사람과 사람 간에 거래되는 금융상품이 엄청나게 많고 거래규모도 거대하다. 자연스레 거래하는 데 있어서 많은 사람을 아는 것은 딜의 성립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꼭 거래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정보는 돈이 된다. 그리고 정보는 명시적으로 탁 나타나지 않는다. 단서를 흘리고 그것들을 통해 각자 뇌피셜로 추정해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보는 투자에도 필요하지만, 여의도의 특이한 모습, '이직'에도 필요하다. 여의도 증권가는 이직이 잦다. 컴퓨터와 사람만 있으면 이쪽 일을 할 수 있기에 사람에 대한 투자가 많고, 스카우트도 수시로 일어난다. 그래서 여의도에서 이직을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이 데리고 올 사람에 대한 정보, 가야 할 곳의 구성원에 대한 정보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여의도에서는 인간관계의 확장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고, 그 확대된 인관관계는 관리 및 유지, 보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구실이 '함께 점심'이다. 그냥 가끔씩 점심 파트너가 바뀌는 것이 아닌, 매일 새로운 사람과 점심을 먹는 일이 흔하다.(물론 어느 정도 되면 파트너가 로테이션을 돌게 된다.) 


  세 번째는 책상 앞에서 먹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다른 곳에서도 점심식사를 도시락이나 포장음식으로 많이들 해결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여의도는 그 음식을 책상 앞에서 먹는 경우가 꽤 많다. 오히려 탕비실이나 회의실과 같은 다른 공간에서 먹는 일이 훨씬 드물다. 굳이 책상 앞이 아니라면 책상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마디로 모니터가 보이는 곳에서 먹는다. 그리고 이런 류의 사람들은 금융상품의 가격 급등락에 영향을 받는, 금융기관 매매 파트나 운용파트에 종사하는 종족들, 소위 프런트 라인이다.


  증권가에는 '도시락 폭탄'이라는 말이 있다. 점심시간에 뻥 하고 거래량의 폭탄이 터져서 가격이 급락 또는 급등을 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주로 어떤 매매주체가 한쪽 방향으로 대량 매매를 하면 발생한다. 점심시간에는 대부분 식사를 하러 나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시장의 깊이, 즉 유동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그 진폭은 더욱 크게 나타난다. 하지만 도시락 폭탄은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워낙 한 번에 큰 규모의 매매 방향이기에 이에 대응해서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지켜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더 큰 손실을 막든지, 폭탄까지는 아니지만 변동성이 확대될 여지가 있는지 파악하면서 포지션을 구축하고 관리하기 위해 책상 앞 모니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부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던가, 웬만한 움직임에는 신경을 안 써도 되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던가, 아니면 그냥 자신 있던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크게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성향 차이로 이런 것만은 아니다. 실제 부서 또는 업무가 그런 것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 포지션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한 번의 생각지 못한 사건이 모든 것을 다 망쳐버릴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겐 모니터링과 대응에 집중하는 것이 편안한 점심보다 필요할 수 있다.


  어디서 먹든지, 어떻게 먹든지, 또 누구랑 먹든지 편안한 점심을 즐기는 자를 여의도에서 찾아보기란 쉽지는 않다. 이게 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말이다. 이제는 은퇴를 하신 분이 해주신 말씀이 하나 있다. 


"아주 편하게 점심 먹는 방법이 2가지 있어. 하나는 아무것도 상관없을 정도로 일이 없으면 돼. 은퇴시점이 다가왔다는 거지. 다른 하나는 점심을 편안하게 먹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올라가면 돼. 잘 나간다는 거지."


아직 점심을 마냥 편하게 먹지는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구나'라고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다소 특이한 여의도에서의 점심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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