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
점심시간, 그녀의 샌드위치 가게 전화기가 불이 난다. 주변 오피스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문이 생각보다 간단하다, 23번 샌드위치 하나, 7번 샌드위치 하나, 이런 식으로 주문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샌드위치 가게에는 101가지의 샌드위치가 있다. 모든 샌드위치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다양한 빵과 내용물에 따라서 101가지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도 메뉴 중에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에 샌드위치가 있기 마련이다. 번호로만 주문하니 주문 착오도 거의 없고 주문도 빨리빨리 준비된다.
막상 실내에서 식사할 수 있는 자리는 고작 6자리, 대다수의 주문은 인근 병원과 오피스에서 배달을 부탁한다. 근처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터커 씨는 항상 $6짜리 샌드위치를 시키며 배달 팁과 함께하라며 $10을 준다. 벌써 이 집의 단골이 된 지 10년이 넘어간다고 한다.
전쟁 같은 점심시간이 넘어가고 나면 그녀는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영자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평소 샌드위치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크게 영어가 필요 없고 더더욱 번호로 주문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샌드위치를 만들면 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영어를 쓸 일이 더욱 없기에 늘지 않는 영어를 위해서 매일 영자 신문을 보면서 영어를 공부한다.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는 제대로 해야지 앞으로도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녀였다.
1970년대 한국, 미군 부대 근처에서 살던 그녀는 하루는 미군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요즘 같으면 당장 경찰을 부르고 수사가 시작되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처녀가 몹쓸 짓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보다는 조신하게 다니지 않았으니 저런 일을 당했을 거라는 삐딱한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입은 성폭력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더 불편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몹쓸 짓을 했던 미군이 책임감을 가지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외국인 사위를 맞는 것도 불편해하던 그녀의 부모님은 결국 없는 딸 치겠다며 더 이상 소문이 안 나게 미국으로 가라고 종용했다. 그래서 그녀는 말도 안 통하는 멀고 먼 미국으로 미군 남편을 따라오게 됐다. 미국에서도 남동부 시골, 한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다른 동양인들도 보이지 않는 시골로 남편을 따라왔다.
운명이려니, 내가 조신하지 못해서 그랬으려니 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녀를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통하는 남편과 함께 그곳에 정착하며 일어난 모든 일을 운명이려니 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영어가 되기 시작하자 마을 패밀리 레스토랑에 웨이트리스로 일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을에 소문은 금방 퍼지고 귀엽고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여성이 서빙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러 왔다. 한국에서처럼 불편한 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호기심으로 본인을 보러 온 손님들이 부담스러웠고 개중에는 짓궂은 손님들도 종종 있었다.
그녀가 레스토랑에 잘 적응하고 있는 동안 반대로 그녀의 남편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인으로만 지내다가 막상 고향에 와서 다른 일을 하려고 하니 군대와는 다른 사회에 이질감을 느끼고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면서 적응을 못하고 점점 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알코올중독 수준이 되어버린 미군 남편은 본인만 믿고 미국까지 온 그녀를 폭행하기 시작했고 둘의 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는 않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들지만, 현실은 멀고 먼 나라의 비행기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동남부 시골에서 LA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까지 나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라던 친정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루하루 그렇게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 그녀의 몸에 난 상처를 봤던 식당 손님 중 한 명이 경찰에 신고하고 남편은 결국 격리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혼을 하게 된 그녀는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해졌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재산권 분할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그나마 나눌 재산도 거의 없던 남편이었다. 그동안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지만, 이제는 하루 종일 일을 해야지 먹고살 수가 있었다.
평소 성실히 일하던 그녀를 지켜보던 주방장이 그녀를 불렀다. 웨이트리스만으로는 생활이 힘들 테니 요리를 배워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면서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끝에 전남편이 있어서 불편했던 그 마을을 떠나 LA로 오게 됐다. 한인들이 많이 있다고 하니 좀 낫겠지. 그리고 한국과도 심리적으로나 거리상으로나 좀 더 가까우니 LA로가서 정착하고 싶어졌다.
외국 여성이 만드는 정통 미국식 샌드위치는 당시 백인들에게는 외면받기 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대면을 하면서 주문을 받는 방식이 아닌 번호로 주문을 받는 방법을 궁리했고 여러 가지의 빵과 내용물을 조합해 사람들이 선호하는 101가지의 샌드위치를 개발했다. 주변의 상가와 병원 오피스 등에 101가지가 상세하게 적힌 메뉴를 돌리고 배달 위주의 샌드위치 가게를 시작했다.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선호하는 샌드위치 번호를 외우고 앵무새처럼 번호로만 주문하기 시작했다. 가게가 정상화가 되자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표현조차 하지 못해서 손해를 봤던 지난날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바쁜 점심시간이 끝나면 사전을 옆에 두고 영자 신문을 읽는 것이 루틴이 됐다.
어느 날 친정과 연락이 됐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고 시선이 바뀌어 당시의 부끄러운 딸이 아니라 억울한 성폭력의 희생양이 됐던 딸이라는 걸 느낀 부모님이 딸과의 재회를 원하고 있었다. 보란 듯 성공해 한국으로 가는 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젠 친정 부모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부끄러운 딸이 아니라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딸’이었다고.
주어진 불행을 불행이라 생각 안 하고 이겨내 인생의 성공으로 이끈 한 여성의 이민야사(移民野史)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