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하는 키워드에 따라 출판계, 방송, 유명인들이 콘텐츠를 생산하면, 알고리즘이라는 유통을 거쳐 나는 소비합니다. 알고리즘을 거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책 제목, 영상 제목을 검색해서 콘텐츠를 소비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직접 찾은 콘텐츠도 업계가 만들어내는 유행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힐링’이 유행할 때 철학자 강신주는 힐링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 난다며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책도, 방송도 힐링이라는 단어를 업고 나올 때였으며, 그런 유행은 어느새 또 다른 유행어에 묻힙니다. ‘자존감, 워라밸, 도파민, 저속노화’ 등이 유행했고 현재 유행 중입니다. 딱히 나는 비판적 소비자가 아니므로 무엇이 유행하든 일단 들여다보고 취하면 그만이라 생각합니다.
스마트폰 중독을 염려하는 콘텐츠가 나올 무렵 나도 최전선에서 중독자로 지냈습니다(지금도 중증은 아니라도 경증 중독자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모유 수유 앱을 켜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고,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동영상 통화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교류했습니다. 2013년생인 아이는 손가락 조작부터 배운 ‘스와이프’ 세대일지 모릅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친구들이 스마트 워치를 차기 시작했고, 그즈음 ‘스크린 타임 제한’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코트라이트가 쓴 "중독의 시대"라는 걸출한 책을 읽었고 인간은 원래 중독에 취약함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시대, 이해관계에 따라, 또는 과학 발달로 인해 무엇이 중독인지도 바뀐다고 합니다. 중독을 개인 의지 부족으로만 봐서는 해결이 어렵고, 중독으로 돈을 버는 ‘변연계 자본주의’(쾌락을 보상으로 주어 제품을 중독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를 봐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게 중독 역사를 공부한 저자 주장입니다.
스크린 타임 제한은 우리 집 뜨거운 감자입니다. 아이와 아빠는 너무 빡세다고 늘 불만이고, 나는 뇌가 형성되는 지금 시기가 중요하니 제한을 느슨하게 할 수 없습니다. 11살 아이는 하루 20분 스마트폰, 일주일 두 번 영화가 대충 허용됩니다. 빡세 보일지 모르나, 여기에 시도 때도 없이 예외가 생깁니다. 친구들, 할머니, 할아버지와 영상 통화는 늘 해도 되니 실상 더 오래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1시간 반짜리 만화영화 위주였던 주말 영화 타임도 이제 ‘반지의 제왕’처럼 한 편이 3시간에 달하는 영화로 바뀌며 더 길어지는 추세입니다. 여기에 학교나 친구들 집에서 보는 영화 시간이 또 추가됩니다. 아무튼 낮, 저녁에는 아이에게 엄격하게 시간 제한하다, 밤이 되면 부부는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달콤한 중독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우린 뇌가 다 컸잖아, 라면서요.
이런 빡빡한 스크린 타임 배경에는 죄책감이 자리합니다. 1년 아이와 애착 육아를 한 후, 경단녀가 될 수 없단 조바심에 어린이집 생활 초창기부터 뽀로로를 베이비시터로 자주 썼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집에 있는 날 마감이 있으면 몇 시간이고 뽀로로를 틀어준 적도 있습니다. 아마도 1살부터 2살 반 정도까지 약 1년 반 동안 아이는 평생 볼 영상을 몰아 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유아기 뇌가 폭풍 성장하던 그 시기 뽀로로 같은 현란한 화면에 얼마나 노출됐는지 남편에게 말하면, 그래도 문제없이 잘 컸지 않냐고, 다른 애들은 훨씬 더 본다고 합니다. 아무튼 아직은 영상 제한이 먹히고 있고 아이 절친 중 스마트폰에 별 관심 없는 아이도 있어서 또래 압력 없이 무사히 굴러가고는 있습니다.
그럼, 어른인 내 영상 중독은 어떤 지경일까요? 유튜브를 켜봅니다. 지금은 5개 채널을 구독 중입니다. 매불쇼, 정희원의 저속노화, 지윤&윤한의 롱테이크,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조용한 생활 이렇게 총 5개입니다. 조용한 생활은 영상 없는 오디오 매거진이라 스크린 타임에서 제외합니다. 우선 매일 업로드되는 매불쇼는 1주일에 두, 세 편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럼, 대충 3시간입니다. 나머지 채널은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매주 1시간 반 정도로 잡으면 매주 고정 스크린 타임은 7.5시간 정도입니다. 이 중 각 잡고 제대로 시청하는 방송은 노무현 재단 알릴레오 북스입니다(시즌제라 지금은 영상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빨래 널거나, 식재료 다듬거나, 외출 준비하며 틀어놓기 때문에 구독하는 채널은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매일 밤 자기 전 책을 손에 드는 대신 스마트폰을 쥐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을 보는 것입니다. 걸그룹 춤부터 옛날 예능까지 다양합니다. 디지털 디톡스는 요원합니다. 어디 온천에라도 가서 호텔 방 금고에 넣어두지 않는 한 거의 매일 1시간 정도 휴대폰 알고리즘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엄마의 영상 중독을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겠죠. 아직 일상생활에 지장 없어 치료는 급하지 않지만, 시력이나 꿀잠에 영향을 줄 테니 나쁜 습관입니다. 저도 답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집안 환경 때문인지 커피도, 콜라 같은 청량음료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카페에서는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예쁜 비주얼 때문에 카푸치노 등을 마신 적은 있습니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믹스를 먹은 적도 있지만, 규칙적으로 커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남편이 된 애인을 만나면서 독한 독일 커피를 알게 됐고 한 12년 정도 아침 커피가 없으면 절대 안 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한국 손님이 오면 우리 집 커피가 너무 독하다며 이런 걸 어떻게 마시냐고 놀라곤 했습니다. 그러다 중독과 도파민 콘텐츠 유행을 타고 내 손에 쥐어진 중독 책을 보다가 새삼 카페인 중독은 안전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재작년 처음으로 커피를 끊어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3, 4개월(?) ‘노 카페인’에 성공했습니다. 초기 두통은 두통약으로, 응가 횟수가 줄어든 건 그냥 자연스레 해결됐습니다. 그렇게 커피를 끊었다가 기억은 잘 안 나는 어떤 계기로 다시 마시게 됐습니다. 이런 것도 ‘재발’이라고 하는 걸까요? 아무튼 그렇게 다시 몇 개월 동안 커피를 즐기며 살다가 두 번째 시도로 작년에 커피를 끊고 이제 1년 정도 됐습니다.
커피를 끊어야 하는 계기는 특별히 없습니다. 혹시 커피를 안 마시면 갱년기와 함께 온 야뇨증, 수면 장애가 좀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은 있죠. 그리고 무엇보다 밖에서 사 마시는 커피가 싫었습니다. 커피 향이 나면 조금 전 집에서 마시고 나왔는데도 꼭 유혹에 넘어가 사 마시는 게 싫었습니다. 집 커피보다 맛도 없는데, 일회용 용기에 담긴 커피를 차마 버리지 못해 내 위장에 버리는 습관이 싫었습니다. 식당 밥도 잘 남기는 편은 아니지만, 유독 커피는 맛없어도 안 버리고 마셔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에 서너 잔도 마셨고 어김없이 잠자기는 글러버렸죠.
커피 끊기에 한 번 실패한 후, 작년 두 번째 시도 때는 확실한 대체제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동안 마셔보고 싶던 보이차를 구해두고, 아로마가 든 녹차와 홍차도 사뒀고, 사용 안 하던 다도 용품을 깨끗이 닦아서 잘 보이는 곳에 뒀습니다. 차 전문점에서 생 보이차를 사고, 차 좋아하는 친구 두 명에게 각각 다른 종류 보이차를 얻어뒀습니다. 두 번째 커피 끊기 시도에서는 총 세 종류 보이차를 번갈아 가며 마셨으니 내 몸에 들어온 카페인(&타닌)양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마치 금연초를 피우듯 일시적 대체물이었지만요. 커피만 안 마셨을 뿐, 하루 종일 카페인과 타닌을 들이부은 거죠. 두 번째 커피 끊기 시도가 아직 실패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좀 여지를 두고 유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카페인 들어간 차는 다 허용하고, 여행 가서는 여행지 커피를 맛보자고 예외를 뒀습니다. 커피 끊기 2차 시도 후 6개월 만에 이탈리아에서 커피 맛집 에스프레소를 주문해서 입에 대던 그 순간이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이러려고 커피를 끊었나 싶었죠. 여행지에서 매일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차 생활로 무난히 돌아갔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치아 변색도 덜 되는 것 같고 이젠 밖에서 커피 향이 나도 ‘음, 좋다~’만 하고 사 마시지 않습니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안 피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듯, 커피도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안 마시도록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상 중독은 치료할 동기나 필요가 아직 절실하지 않아 그냥 두지만, 커피 강박은 나름 조절한 듯해서 안심됩니다. Rückfälle라는 독일어, relapse라는 영어를 우리말로 ‘재발’이라고 하면 왠지 느낌이 살지 않습니다. ‘재중독’이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재발’ 또는 ‘재중독’ 없이 여행 커피와 특별 예외를 허용하며 커피 없는 삶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아직 1년 차니 겸손하게 그리고 경계하며 지내봐야겠습니다.
(커버 이미지: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