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은 불편합니다. 라스 폰 트리에 영화처럼 오싹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보게 되지만 그렇다고 중간에 관둘 수도 없습니다. 그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친숙한 한국 작가가, 나도 읽어본 작품으로, 넘사벽 같았던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신났습니다. 여기저기 뉴스 사이트를 새로 고쳐서 사소한 소식이라도 추가된 게 없는지 뒤져보며 오후와 저녁을 보냈습니다. 심드렁한 아이와 남편에게 호들갑 떨고 저녁 먹으며 건배도 했습니다. 단조로운 삶에 이런 빅 이벤트를 선사해 준 스웨덴 한림원, 최고입니다!
저녁을 먹고 책장에서 "소년이 온다"를 다시 꺼냈습니다. 몇 년 전, 디지털 디톡스하러 단골 온천에 가져갔다가, 못다 읽고 왔더랬습니다. 온천에는 주로 읽기 힘든 책을 가져가는 데, 중도 포기한 후 먼지만 쌓인 책입니다. 5.18이라는 소재가 나를 짓눌렀던 것도 같고, 당시 내 상황 때문인지 소설에 집중 못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읽어보리라 맘먹고 보니, 새삼 표지 뒤 신형철 추천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마 이 책을 처음 시도했을 때는 신형철을 알기 전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신 평론가 최고 작품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도 읽었던 터라 추천사가 새삼 반갑습니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그러고 보니 신형철과 한강은 조곤조곤 말하는 투며 섬세하고 단정한 문장을 쓰는 공통점이 있네요. 지면과 매체에서 단편적으로만 접했어도, 둘 다 한없이 겸손하고 내면이 무한 우주 인듯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이 세련됩니다. 책만 파고들 것 같은 문학도 외양과는 다르게, 문체만은 두 사람 다 매끈하고 세련됩니다.
"소년이 온다"는 스포일러 없이, 부가 정보 없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1장이 가장 아름답고, 책 중간쯤 고문 묘사 등에서 좀 진부하다고 느껴지다, 에필로그에서 빵 터지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출간된, 이제는 세계 고전 문학이 될 이 책에 무슨 스포냐고 하겠지만, 책 읽으려는 분은 리뷰 같은 건 보지 말고 그냥 시작하길 바랍니다. 나는 저녁에 시작해 새벽 1시 반쯤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1장 어린 새는 시와 그림과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혼'이 겹치고 어떻게 할 줄 몰라 떨어져 나가고 방황하다 깨닫게 되는 묘사가 압권입니다. 시인은 시인인가 봅니다. 1장이 가장 좋은데, 난 왜 첫 시도에서 1장도 채 못 끝냈던 걸까요. 이렇게 아름답고 오싹한 스토리를 말입니다. 초반에 너무 강력하게 감동해서인지, 중간 지점부터는 평이하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맨 뒤 책 탄생 배경, 작가의 작품 준비 과정, 마지막 초 켜는 부분에서는 내 '혼'이 털렸다 토닥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휘몰아치는 감정 동요, 오랜만입니다. 물론 워낙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해 그렇기도 합니다.
노벨상 수상에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태지만, 나는 무엇보다 책 한 권을 들고 몇 시간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험을 덕분에 또 하니 행복합니다. 첫 책에 재능을 쏟아붓고 흐지부지해지는 작가가 많은데, 좋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기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강이 더 대단합니다. 당분간 한강의 종이책을 구하려면 힘들지 모르니, 서둘러 검색을 해봐야겠습니다. 자전적 이야기가 있다는 데 그걸 먼저 읽고 싶습니다. 한강 작가님,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좋은 작품 만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