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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04. 2023

얼어죽을 만큼 차갑고, 녹아내릴 만큼 뜨거운

소설 [까멜리아 싸롱] 4화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열차.

짙은 회색의 거대한 몸체, 신출귀몰한 귀신고래를 닮은 열차였다. 함박눈을 맞으며,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거센 포말을 일으키며, 귀신고래처럼 매끄럽고 경쾌하게. 열차는 어쩐지 신나 보이는 몸짓이었다.      


한편, 고요한 동백역 역사.

여순자와 유이수, 마두열과 지원우. 까멜리아 싸롱 직원들이 나란히 서서 열차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보고만 있어도 멀미나. 좀 살살 달려도 좋을 텐데, 성질이 너무 급해. 태생이 급행열차야. 우리 중에 제일 최근에 열차 타본 사람이 이수던가?”

“예스, 마담. 부끄럽지만 전 무지 시끄러웠어요. 문이란 문은 부서져라 다 두드리고 다녔거든요. 꼭 요란한 사람 하나 있을 거예요.”     


쾅쾅쾅! 설진아는 창문을 두드렸다. 나 출근해야 된다고! 진아는 자리에서 튀어 올라 객차 연결문을 확인했다.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는 닫힌 문. 건너 칸은 텅 비어 있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어지는 으스스한 기내 방송.     


[안내 말씀드립니다. 우리 열차는 오늘의 운행을 마치고 겨울잠에 들어갑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라며, 마지막 역인 동백역에서 한 분도 빠짐없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말도 안 돼. 진아는 문이란 문은 모조리 쾅쾅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은 꺼졌고, 객차 문은 잠겼고, 사람들은 갇혔고, 눈은 펑펑 쏟아지고, 창밖엔 외딴섬이 보이고, 열차는 바다 위를 달리고. 이제 여기서 누구 하나 죽으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열차. 그런 건가.      


진아는 깨달았다. 악몽이구나 이건. 그 와중에 출근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왈칵 눈물이 솟았다. 이게 악몽이라면, 갑자기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망망대해에 빠져버리고 이상한 짓을 해봐야 그래야만 깰 수 있는 건가. 그런 진아를 비웃듯이 열차는 덜컹덜컹 세차게 흔들렸다. “이 꿈 어떻게 깨요? 나 출근해야 돼요.” 진아는 소리쳤다.      


“개중엔 좀 특이한 인간도 있습니다만.” 

지원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흥미로웠다. 깜박, 눈 감았다 떴을 뿐인데 바다 한가운데라니.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았던 안지호는 이 비현실적인 설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사라지고 싶다던 바람이 드디어 이뤄진 걸까. 환상일까 꿈일까. 아니면 평행우주? 아무렴 어때. 현실보다 비현실이 훨씬 마음에 드는 걸. 지호는 이어폰 볼륨을 한껏 올리고 창밖을 구경했다. 다크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Too bad but it's too sweet. It's too sweet it's too sweet.’ 눈보라를 헤치며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설국열차, 그 안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들이라는 상상.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끝내준다, 이거.     


“아니,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바다 위를 달리는데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그냥 꿈속이구나 생각하고 즐겁게 왔거든요. 으하하.” 마두열이 호쾌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좋은 꿈이네. 박복희는 기분이 좋았다.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눈도 보고, 바다도 보고 좋지. 동백역이라니 꽃도 보면 참말로 좋겠네. 어딜 가든 상관없어. 탁 트인 창가에서 햇볕 쬐니까 광합성하는 식물처럼 노곤노곤하니 덜 아픈 것 같았다. 배낭을 끌어안은 복희는 꽃 보러 가는 상춘객처럼 방그레 웃었다. 이상하게도 설렜다.     


“간혹 어떤 예측조차 불가능한 인간도 있고요.” 

지원우가 대답했다.      


드르렁드르렁. 구창수는 이 소란통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간 밀린 잠을 한꺼번에 몰아 자는 사람처럼 좌석 기둥에 고갤 박고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푸우우우우. 숨구멍으로 뜨거운 공기를 내뿜는 고래처럼, 열차는 세찬 증기를 내뿜으며 당당한 기세로 동백역에 들어섰다. 두열이 넌지시 순자에게 물었다.     


“마담, 제가 같이 인사드릴까요?”

“아니요. 두열 씨는 언제나 다음 순서가 좋겠어요. 두열 씨는 뭐랄까. 첫인상이 너무나 강력하게 인상적이거든. 백곰 안에 순두부 같은 마음씨야 모두들 차차 알게 될 테니까. 두열 씨는 그냥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어요. 꼭 입이랑 눈이랑 한꺼번에 웃어야 해요. 빙그레. 오케이?”

“예쓰, 마담!”     


쿠르르르 가쁜 숨을 몰아쉬듯 열차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고생했어. 숨 좀 고르렴.” 순자는 뜨거운 열차 몸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열차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심장박동 같은 진동과 기계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치이이익 증기 소리와 함께 열차 문이 열렸다.      


“갈까요, 이수?”

“예스, 마담.”      


순자와 이수는 사뿐한 걸음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기둥을 끌어안고 있던 진아가 득달같이 따져 물었다.      


“당신들 누구예요? 여기 어디예요?”      


순자는 대답 대신 진아를 빤히 마주 보았다. 차분하지만 강렬한 눈맞춤이었다. 순자가 미소 지으며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백역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열차가 그리 편안한 승차감은 아니었기에 멀미가 나실 거예요. 궁금한 것들 많으실 텐데요. 여긴 너무 추우니까, 일단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언덕 위에 따뜻한 다방이 있습니다. 거기서 몸 좀 녹이면서 차근차근 얘기해 드릴게요. 나눌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딜 어떻게 믿고 따라가요?”

“걱정 마요. 진아 씨. 출근보다 훨씬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여기 온 거니까.”     


순자와 눈을 마주친 진아는 입을 다물었다. 설진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단지 이름을 아는 것뿐 아니라, 이 노인은 마치 자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여러분, 밖에 눈이 펑펑 내려요. 첫눈을 동백섬에서 맞으시겠네요. 그치만 많이 미끄러우니까 저희 따라서 조심조심 따라오셔야 해요. 할아버지, 곤히 잠드셨네요. 지호 씨, 좀 도와줄래요?”     


활짝 웃는 이수의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아무래도 또래 같아 보이는데. 지호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감추고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이수와 지호가 비몽사몽인 창수를 부축해 먼저 내렸다. 뒤이어 복희도 씩씩하게 배낭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희 씨, 반가워요.”

“여사님... 저희가 만난 적 있던가요?”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순자는 오랜 친구와 재회한 듯 활짝 웃으며 복희의 팔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내리자마자 험상궂은 얼굴로 빙그레 웃는 두열을 맞닥뜨리곤 흠칫 놀라는 눈치였지만.      


“여러분, 반갑습니다! 아유, 어르신 잠이 푹 드신 모양입니다. 아기처럼 주무시네요.”     


두열은 잠에 취한 창수를 가뿐하게 둘러업었다. 지호와 창수가 내리고, 복희도 내리고. 뒤늦게야 따라 내리는 것 같았던 진아. 그러나 출구에 다다르자 갑자기 쾅, 열차 문을 밀어 닫았다. 그래, 까짓것 해보지. 미친 짓.


“싫어요! 전 죽어도 안 가요. 다시 양미역으로 보내주세요.”

“이쪽이었네요. 예측 불가능한 인간.”

“부탁해요. 원우 씨.”

“예스, 마담.”     


원우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창수를 부축한 두열을 선두로 사람들은 역사 밖으로 사라졌다.


원우는 닫힌 문 앞에 섰다.

손을 뻗어 열차 몸체를 만져보았다. 그 사이 열차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칠 줄 모르는 눈. 한기가 느껴졌다. 닫힌 열차 문을 사이에 두고 지원우와 설진아가 마주 보았다.     


“설진아 씨, 내리시겠어요?”

“거 봐. 당신들 우리 이름 다 알잖아. 이거 분명 납치야.”

“납치 아니고 초대입니다.”

“난 초대받은 적 없어요. 멋대로 데려와선 따라오라니 이게 말이 돼요? 물어보면 암것도 말 안 해줘. 망망대해 이런 홀대도 서러워 죽겠는데.”

“홀대 아니고 환대입니다. 어쨌든 설진아 씨, 지금은 내리셔야 합니다.”

“환대 한 번 겁나 살벌하네요. 아저씰 뭘 믿고 내려요. 어서 돌아가게 해 줘요.”

“저 아저씨 아닙니다.”

“저 출근해야 해요, 아.저.씨. 그냥 출근만 하게 해 줘요.”     


이 와중에 출근 타령하는 인간이라니. 말 한마디 지지 않는 인간이라니.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따따부따 대꾸에 원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출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젤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이에요. 이 시즌에 계약직 직원이 무단결근이라니 바로 잘린다고요. 저요. 엄동설한에 혈혈단신, 사방에서 돈이 줄줄 새서 춥고 고달파요. 월세에 관리비에 생활비에. 아저씨, 이 엄동설한에 저 잘리면 책임질 건가요? 지각 정도로만 결근 면하게 해 줘요.”

“미안하지만 출근 못 합니다. 겨울이 끝날 때까지 열차는 꼼짝하지 않을 테니까요.”

“방금 겨울 끝날 때까지라고 했어요?”

“네, 겨울 끝날 때까지요. 뒤틀린 시공간을 달려온 열차는 동면에 들어갑니다.”

“시공간이 뒤틀렸다고요?”

“뭐 하자는 겁니까?”

“현실 파악이요.”     


진아는 칭칭 감은 빨간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씩씩거렸다. 꿈에서도 현실을 파악해야 해? 되게 현실적인 꿈이네. 뒷골이 싸늘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 정도로 한기가 돌았다.     


“저, 망했네요.”

“파악 완료됐으면 내리시죠. 제가 멋대로 당신을 끌어낼 순 없습니다. 당신 의지만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건 초대와 환대니까요.”

“이런 납치 비스무리한 초대가 어딨어요? 홀대 같은 환대가 정말이지 따뜻해 죽겠네요.”

“아뇨. 얼어죽을 겁니다. 열차는 이대로 얼어붙어 겨울잠을 잘 겁니다. 따뜻해 죽기는커녕 그대로 있다간 얼어죽을 겁니다.”

“얼어죽을.”

“이제야 완벽히 현실 파악되셨나 봅니다.”     


말 한마디 지지 않는 재수 없는 남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얼어죽을. 망한 꿈이 분명했다. 꿈에서 깨 보려고 별별 이상한 짓을 해봤는데도 소용없었다. 열차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마다 눈꽃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천장과 좌석이 냉동고처럼 얼어붙었다. 진아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추웠다. 얼어죽을 만큼 추웠다. 딱 죽고 싶을 만큼 추웠다. 꿈에서조차 홀로 얼어죽을 쓸쓸한 인생. 그때, 문밖에서 묘하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결심한 듯 진아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을 딛는 순간, 꽝꽝 얼어붙은 바닥에 미끄러져 휘청 몸이 뒤로 기울었다. 둥실 떠오른 것도 같았다. 그때였다. 원우가 두 팔을 뻗어 진아를 끌어안았다. 진녹색 터틀넥 스웨터에 새빨간 목도리가 한 사람처럼 겹쳐졌다.     


“정말이지,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군요.”     


목도리 위로 발그레 추위에 언 진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송이 하나둘. 진아의 뺨에 내려앉았다. 설진아는 보았다. 새파란 하늘, 간지러운 함박눈, 아주 환한 빛, 그리고 남자의 얼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원우와 눈을 마주친 순간, 원우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바다 같아. 깊고 푸른 바다색 눈동자. 이 세상 사람의 눈이 아닌 것 같았다. 진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를 만나본 적 있었던가. 얼어죽을 만큼 차갑고 녹아내릴 만큼 뜨거운 이상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다시 돌아온 기분이랄까. 진아가 멎었던 숨을 내쉬자 숨이 돌고 피가 돌고, 비로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꿈결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첫눈이었다.  


지원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순간, 설진아는 마음먹었다.

잘생긴 아저씨였어. 이런 꿈이라면 깨지 말고 조금 더 머물러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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