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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11. 2023

진실도 작게 말한다

소설 [까멜리아 싸롱] 5화

온기가 필요해.

움츠리고 웅크린 것들. 응고된 것들을 깨어나게 하는 건 세상에 온기뿐이라지. 여순자는 찻잔에 따뜻한 물을 부었다. 붉은 꽃송이가 둥실 떠올랐다.

    

“까멜리아티입니다. 이 섬은 동백나무 군락지거든요. 제때 피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동백 꽃봉오리들로 직접 만들었어요. 버려진 것 같아도 세상 모든 건 제 쓸모가 있지요. 까멜리아티는 따뜻하게 마시면 피가 잘 돌게 해줘요. 추위도 긴장도 한결 나아질 겁니다. 첫 만남에는 조금 따뜻한 걸 동원하면 좋으니까요.”     


순자의 목소리는 적당한 온도의 찻물처럼 따스했다. 이수는 응접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차를 건네주었다. 두열은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고, 원우는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올렸다. 벽난로가 타오르고 훈기가 돌았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아리아. 바흐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까멜리아 싸롱.     


창수는 이제야 잠이 깨는지 몽롱한 얼굴로 싸롱 안을 둘러보았다. 복희는 손난로처럼 찻잔을 감싸 쥐었고, 지호는 고갤 숙인 채 우러나는 선홍빛 찻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아는 여전히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추위일지 경계심일지 모를 무언가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까멜리아 싸롱에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마담 여순자입니다.”     


붉은 숄을 두른 여순자가 원형 안경을 고쳐 올리며 인사했다. 고희쯤 되었을까. 곱게 빗어 올린 백발머리와 세련된 옷차림, 무엇보다도 꼿꼿한 자태에서 기품이 흘렀다. 창수와 복희, 지호와 진아. 모두와 눈맞춤을 나눈 순자는 직원들을 소개했다.     


“객실장 마두열 씨. 2층 객실 총괄 담당자이자 싸롱 안에서 힘쓰는 일은 모두 두열 씨의 손을 거친답니다.”     


화이트 셔츠에 네이비 넥타이를 맨 두열. 단추를 끝까지 잠근 데다가 넥타이마저 너무나 단정해서 우락부락한 덩치가 둥그런 판다처럼 보이는 거구의 남자였다. 아까처럼 험상궂은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장착한 두열. 이수가 팔꿈치를 툭 치며 눈꼬리를 가리키자 그제야 두열은 아하, 깨닫곤 눈을 찡그렸다. 여전히 험상궂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애써 웃는 얼굴이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매니저 유이수 씨. 모르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답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야무진 이수 씨에게 말씀하세요.”     


아이보리색 모직 원피스에 베이지색 베레모를 쓴 이수는 오른쪽 치맛단을 살짝 올려 품위 있는 숙녀처럼 인사를 건넸다. 베레모 아래로 말괄량이 삐삐처럼 삐져나온 양갈래 머리, 단정한 원피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더 귀여웠다. 새초롬히 사람들을 살피는 눈빛이 초롱초롱한 소녀였다.     


“그리고 사서, 지원우 씨. 여러분의 인생 기록을 다룰 겁니다.”     


진녹색 스웨터를 입은 원우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입꼬리를 올리자 쌍꺼풀 없는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진아는 선명한 조명아래 원우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중한 말투와 목소리로 짐작했던 나이보다 그는 훨씬 젊어 보였다. 웃을 땐 서글서글한 청년 같아 보였는데, 미소를 거두자 순식간에 오래 산 노인처럼 눈빛이 쓸쓸해졌다. 햇살이 비치면 저 눈동자는 깊고 푸른 바다색, 바다처럼 일렁이겠지. 어딘지 모르게 다가가기 어려운 멀끔하고 이지적인, 쓸쓸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궁금했다. 그리고 익숙했다. 익숙한 이 느낌은 뭘까, 그 또한 궁금했다. 마담 여순자는 숄을 가지런히 여미고 말을 이었다.     


“까멜리아 싸롱은 첫눈 내릴 때 열고 동백꽃 필 때 닫습니다. 여러분은 동백꽃이 필 때까지 이곳에 머물 겁니다. 1층은 다방과 서재, 2층은 객실이고요. 싸롱 뒤에는 온실 정원과 집무실로 사용하는 별채가 있습니다. 작은 섬이지만 꼭대기 등대를 비롯해 곳곳에 저희의 손길이 스민 보금자리들이 있지요. 까멜리아 싸롱의 가장 특별한 점이라면, 밤마다 응접실에서 다양한 모임이 열린다는 거예요. 겨울은 밤이 길고, 밤은 이야기 나누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여러분은 여기 편히 머물면서 그간 살아온 인생과 기억을 돌아보실 겁니다. 그리고 동백꽃이 필 때까지, 각자의 인생에 남기고픈 단 하나의 기억을 찾으시면 됩니다.”


“왜 머뭅니까? 저는 출근하던 길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구창수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돌처럼 딱딱한 얼굴, 뚝뚝한 말투였다. 차라리 무방비로 잠들었을 때가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저도 출근길이었어요. 저도 학교 가는 길이었어요. 복희와 지호가 거들자 진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째서요? 왜 우리가 여기 머물러야 하는 건가요?”     


싸롱 안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나마 명랑했던 두열과 이수도 이 순간만큼은 잠잠해졌다. 원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순자를 바라보았다. 순자는 가슴께에 두 손을 올리고 숨을 골랐다. 응접실에 모인 모두를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그러나 묵직한 한마디를 전했다.      


“여러분은 죽었으니까요.”     


이윽고 침묵.

단순하고 명징한, 바흐의 아리아 선율이 울려 퍼졌다.     


“여러분은 모두 죽었습니다. 여기는 이승과 저승 사이, 중천입니다. 이승을 완전히 떠나기 전, 49일 동안 머물며 그간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는 곳이죠. 여러분 생애 마지막 시간이 춥지 않도록, 저희는 마음을 다할 겁니다.”     


하. 진아는 맥이 풀렸다. 꿈, 아니었어? 죽었다고? 내가?      


“농담이... 심하잖아요. 멀쩡한 출근길에 갑자기 죽어버렸다고요? 차가 막 바다를 달리고, 겨울잠 잔다고 얼어붙고, 언덕 위엔 이상한 다방이 있고. 다 꿈인 줄 알았죠. 그런데 알고 보니 죽었다. 나는 출근하다가 죽어버렸다. 이게 진짜라고요?”

“농담 아닙니다. 말씀 드렸죠. 진아 씨는 출근 못 한다고.”

“원우 사서...”     


순자가 원우를 불렀지만, 원우는 지나치리만큼 냉랭한 얼굴로 진아에게 말했다.     


“인생은, 대단할 것 같지만 실은 시시합니다. 인간은 시지프스처럼 매일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죠. 반복되는 하루, 단조로운 일상이야말로 당신의 인생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응당, ‘항상성恒常性’이란 걸 가지고 삽니다. 생존의 최적 조건을 벗어나는 변화가 생길 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죠. 항상성은 위험을 감지할 때 십분 발휘됩니다. 그럴 때 인간의 무의식은 강렬했던 한때의 순간이 아니라, 자주 오래 반복되었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대체 무슨 말이에요?”

“당신의 죽음을 말하는 겁니다. 가장 강렬한 변화이자 위험, 죽음이 닥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경우에는, 죽어서도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일상을 반복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정작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죠.”


“우리가 예상치 못하게 죽어버렸단 건가요?”

“여러분 모두 매일 출근하던 일터와 학교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라탔을 겁니다. 진아 씨는 어제 어떤 하루를 보냈습니까? 아니, 오늘 아침 출근 전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죠?”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꿈이라면 나았을까. 진아는 울먹였다.     


제가 죽었다고요. 어떻게요?”

죽음의 사유는 그쪽이 찾아내야 할 일입니다.”

“억울해... 이건 너무 억울해요. 죽어라 돈만 벌다가 진짜로 죽어버렸다고요?”

“유감입니다. 그렇지만 진아 씨는 죽었습니다. 충격적이겠지만, 부정과 회피를 거쳐 결국 수용하게 될 겁니다. 받아들여야 할 진실입니다.”

뭐가 그렇게 쉬워요? 그쪽은 죽어봤나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요?인간이라면 이렇게 잔인하게 말 못 하지.”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만.”

“원우 씨, 그만. 진실도 작게 말한다.”     


순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원우를 막아섰다. 진아는 울고 있었다. "... 예스, 마담." 원우는 한 걸음 물러섰다. 순자는 인자하지만 몹시 결연한 표정이었다.      


“어떤 진실은 이해는커녕, 감당하기조차 힘드니까요. 저는 오늘 단 하나의 진실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모두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만, 이제 갓 죽었다고 해야겠죠. 갓 죽은 인간 역시 갓 태어난 인간처럼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알아가야 하죠. 저희는 죽음 이후 중천에서 여러분을 도와 안내하는 안내자들입니다. 당장은 혼란스러울 겁니다. 일단 따뜻한 차를 마시고, 오늘은 푹 쉬세요. 까멜리아 싸롱에 머무는 동안 저마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작은 진실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될 거예요.”     


단 하나의 진실,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진아를 제외한 이들은 이상하리만큼 쉽게 그 진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마치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렇군요. 대답하는 사람들처럼. 일흔다섯 구창수는 오늘내일 불쑥 죽음이 찾아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안지호는 깔끔하게 사라져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박복희는 이제야 죽었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온탕에 들어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노곤하게 풀어졌다.


설진아만 울었다. 다들 억울하지 않아요? 이 상황이 이해가 돼요? 내가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악착같이 돈 벌었는데. 진아는 웅크린 채 울었다. 유이수가 조용히 진아 곁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두열도 미소를 거두고 사람들 뒤 울타리처럼 우직하게 서 있었다.     


“꽃이 피네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깬 건, 복희였다.      


“죽은 꽃도 활짝 피네요. 눈도 보고 바다도 보고. 꽃도 보나 했는데 정말 이렇게 보네요. 예쁩니다.”


따뜻한 물에 풀어진 까멜리아티. 찻잔 안에 동백꽃이 활짝 피어났다. 선홍빛 찻물이 짙게 붉어졌다. 복희는 까멜리아티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합니다.”     


복희가 순자를 보고 웃었다.

순자가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렁그렁한 눈이었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

솔직하다는 것. 거짓 없다는 것. 눈처럼 환하고 순수할 것 같지만 때로 진실이란 숨김없이 명백해서 잔인하다. 차갑다. 때로 진실도 아프다.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당신은 죽었다는 단 하나의 진실이 당신을 날카롭게 찌른다. 온기가 필요해. 그나마 덜 아프기를 바라며 조심스럽 사려 깊게, 애써 따뜻한 것들을 동원한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     


단조로운, 그러나 아름다운 바흐의 선율이 까멜리아 싸롱에 흐른다. 갓 죽은 인간들이 진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순자와 원우, 두열과 이수는 침묵을 지킨다. 어떤 순간에는 말 없는 말이야말로 진심이므로.

 

따스한 찻잔에 죽은 동백꽃 활짝 피어날 때, 환한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안에서 보는 눈은 따뜻하기 그지없는데, 창밖에 쌓이는 눈은 차가울 테지. 안과 밖. 생과 사. 진심과 진실. 따스한 싸롱 안에 서늘한 진실이 눈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세상의 끝, 까멜리아 싸롱에 진실의 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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