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Sep 18. 2023

죽은 자의 인생기록대백과

소설 [까멜리아 싸롱] 6화

여기서 제일 먼저 좋아진 건 이불이었다.

하얗고 포근한 이불. 구름 같은 이불을 덮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졌다.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아도, 힘들게 견뎌내지 않아도, 한결 덤덤하게 나아졌다.


면과 솜과 면, 겹겹의 단순한 결합에 불과했지만 이불에는 힘이 있었다. 갓 죽어버린 나를, 덩그러니 홀로 나뒹구는 나란 존재를 가만히 안아주는 것 같았다. 너무 껴안으면 숨 막히니까 너무 느슨하면 쓸쓸하니까 조용하게 가만한 포옹.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가만히 안아주는 온기 덕분에 이미 죽었대도 오늘은 한결 나아졌다. 어쩌면 괜찮아진다는 건 이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시공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이불에 안긴 채 '오늘'을 생각했다.


유이수는 까멜리아 싸롱에서 맞이한 첫 아침을 떠올렸다. 곤히 잠들었다가 이불속에서 눈을 떴을 땐 한결 나아져 있었다. 죽음, 충격, 슬픔, 미련, 후회까지도 모조리 이불을 덮어준 듯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이수는 부드러운 이불깃을 매만지며 나무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구에서 은은한 나무향이 났다.


조용했다. 창밖은 눈 내리는 아침. 눈을 머금은 흰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주위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선명한 호흡과 예민한 감각들이 이수를 깨웠다. 이상했다. 이수 자신이 온전하게 느껴졌다. 살아있었을 때보다 더욱 선명히 내가 나로 느껴지는 감각. 깨끗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라면 이상할까. 잠든 사이에 나를 깨끗한 물에 조물조물 빨아 탁탁 털어선 햇볕에 잘 말려 차곡차곡 개어둔 것 같은, 불순물 하나 없는 순전한 자신을 마주했다.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에는 이수가 아끼던 소지품이, 옷장에는 즐겨 입던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마치 이수의 방 일부를 옮겨온 것처럼 간소하지만 익숙한 물건들이 제자리인 듯 놓여있었다. 그리고 침대 발치에 커다란 나무상자가 보였다. 상자를 열었다.


유이수 兪利水 


이름이 적힌 하얀 책, 아주 크고 두꺼운 책이 들어 있었다. 침대에 앉아 책을 열었다. 유이수 兪利水 1999-2015. 배냇저고리를 입은 아기 유이수 사진을 시작으로 백과사전처럼 글과 사진이 가득했다.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유이수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가 빽빽한 글씨로 이어졌다.


크게 연도순으로 구분된 기록들은 유이수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인생의 단어들과 사진들로 사전처럼 정의되어 있었다. 어렴풋한 어린 시절 기억들까지도 모두. 연도가 더해질수록 이수의 메모와 일기와 편지가 추가 구성되어 두툼해졌다. 유이수의 인생책. 한 사람의 ‘인생대백과’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2004년의 기록들.


보조개 : 타고난 움푹 패인 자국. 엄마는 말했다. “이수가 태어날 때 너무 예뻐서 천사가 콕 찍어주었대.”
잠 : 안 오는 것. “잠이 안 와.” 말하면 엄마가 대답한다. “잠이 잠만 기다리래. 잠방잠방 잠이 오고 있대.” 그래도 안 오는 것.
피아노 : 5세 5월, 임마누엘 피아노에서 처음 배운 후 유이수가 평생 좋아했던 악기.
배롱나무 : 5세 7월, 목화아파트 화단에 핀 여름 꽃나무. 흔히 목백일홍이라고 불리지만 유이수는 메롱나무라고 부름. 메롱나무 꽃은 ‘메롱’ 날름거리는 혓바닥 색깔이라고 함.     


배롱나무 아래에서 엄마와 ‘메롱’ 혀를 내민 채로 함께 찍은 사진이 그 아래 있었다. 아빠는 우릴 찍어주고 있었을 테고. 뭐야. 너무 갑작스럽게 귀엽고 뭉클해서 눈물이 맺혔다. 이어지는 2005년 기록.


교통사고 :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를 데려간 것 같은데 돌아가신 거라고 하는 이상한 사고.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아빠, 나도 여기 돌아온 걸까요. 아님 거길 떠난 걸까요. 이수를 사랑해 준 아빠가 죽은 후에 머문 곳도 여기 같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빠를 생각하면 미안했다. 미안하다 여기는 마음조차 미안했다. 아빠의 죽음에 이수는 평생 죄책감을 느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그날, 아빠가 집밖에 나선 건 이수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빠가 본 이수의 마지막 얼굴은 우는 얼굴이었을 테니까. 한편, 남아있을 엄마와 동생이 걱정되었다. 여긴 생각보다 환하고 따뜻하니까 덜 슬퍼했으면 좋겠는데.


크리스마스 선물 : 6세 크리스마스, 깜짝 놀랄 만큼 좋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남동생 유이진.


그해 크리스마스 사진. 빨간 원피스를 입은 6살 이수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누에고치 같은 아기를 안고 웃고 있었다. 강보에 싸인 조그만 아기. 남동생 유이진은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어쩜, 애기가 애기를 안고 있. 슬픔 뒤에도 기쁨이 있었네. 이수는 훌쩍이며 미소 지었다.


소소하고 세세한 인생기록들을 살펴보며 한참 시간을 보냈다. 단 하나의 단어와 단 하나의 사진만으로도 이수는 그때 그 기억으로 돌아가 자신을 마주했다. 까멜리아 싸롱에서 처음 눈을 뜬 아침처럼,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고 온전한 감각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겪어보는 기분. 마치 다시 살아보는 것처럼.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이수에겐 많은 기억이 있었다. 이수의 인생은 대체로 행복했었다. 여기서 어떤 기억을 고를 수 있을까. 짧지만 행복했고 행복해서 아쉬웠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후회보다 미련이 많아서. 행복했는데, 만족하며 살고 있었는데 나는 왜 죽어버렸을까? 나는 어떻게 죽었을까? 질끈 눈을 감고 맨 뒷장을 펼쳐보았다. 마지막 페이지는 비어 있었다.


까멜리아 싸롱에서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밤마다 나누던 대화와 싸롱 직원들의 도움으로, 이수는 죽음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 있었다. 동백꽃이 피던 날, 이수는 마지막 페이지에 무언갈 적었다. 마치 묘비명처럼. 그렇게 유이수의 인생책을 완성했다.


이수는 고요한 객실 복도를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 망자들은 각자의 인생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푹 자고 일어나 읽어보는 일생의 기록. 어떤 마음일까.


한편, 설진아가 걱정되었다. 진아의 방문 앞에서 버려둔 상자를 발견하곤 들고 가는 길이었다. 상자 위엔 단호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수는 방문을 두드리려다 말고 상자만 들고 돌아섰다. 진아는 마음을 닫아버렸다. 한동안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자신과 꼭 닮은 진아라서. 지금 진아의 마음이 어떨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더욱 마음 쓰였다.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자신처럼 진아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걸까.


“이수이수 유이수.”

“아저씨!”


이수는 거대한 눈사람 같은 두열을 마주쳤다. 두열은 얼굴을 가릴 만큼 바구니 수북하게 이불 빨래를 들고 있었다. 거대한 팔뚝에 탄탄한 근육이 도드라졌다.


“엄청나네요. 도와드릴까요?”

“안돼. 이건 내 거야. 빙글빙글 뽀득뽀득 이불 빨래할 때가 젤루 행복해. 근데 그건?”

“음... 진아 씨요.”

“몹시 단호하군.”

“뭐라도 도울 일이 없을까요?”

“있지. 우린 우리 일을 하면 돼. 난 일단 이불을 더 정성껏 빨아야겠어. 내 이불은 세상에서 젤루 하얗고 몽글몽글하거든! 보아하니 이수는 진아 씨 걱정하느라 종일 바쁘겠군. 허허. 누군갈 걱정하는 마음은 아무나 못해. 어렵고 귀해. 그러니 그건 유이수의 일로 두겠다.”

“저도 할 일 어엄청 많거든요. 그치만 이불은 인정. 아저씨 이불 좋아요. 전 처음부터 좋았어요.”

럼. 어딜 가든 낯선 자리에선 이불이 좋아야 한다. 보드랍고 포근해야 해. 내 정성과 마음과 근육을 다해서 오늘도 해내겠다! 으허헛. 유이수 수고.”


빨랫감을 껴안고 다시 거대한 눈사람 같은 모습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두열. 아저씨! 두열이 돌아보자 이수가 벙긋벙긋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녀석아, 아저씨 놀리는 거냐?” 허허 웃는 두열에게 이수가 메롱 혀를 내밀곤 뛰어갔다.


‘저는, 아저씨 걱정도 맨날 해요!’     




“틀림없이,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군요.”

“틀림없이, 회복 불가능한 상처로군요.”


응접실 탁자 위 설진아의 상자.

지원우 여순자는 나란히 턱을 괴고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반품] 


상자 위에 단호한 두 글자.

까멜리아 싸롱에서 기록 읽기를 거부한 망자는 처음이었다.


“왜 그랬나? 자네답지 않았어. 고스란히 감정을 드러내다니.”

“마담도 첫눈에 알아보셨습니까?”


순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갤 끄덕였다.


“환생입니까?”

“아직 분명치 않네. 우릴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그냥 닮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똑같았어요. 얼굴도 눈빛도 목소리도. 헌데 그리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그리도 다를 수 있다뇨.”

“얼굴이 같다고 그가 그이일린 없지 않나. 사적인 감정으로 상관없는 이를 해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자네, 왜 그리 쌀쌀맞게 구는 건가.”

“너무 같지만 너무 달라서요. 그러면서도 너무 다른 그이가 같은 이이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가증스러워서.”

“자네 마음 이해는 하지만...”

“이해 못 합니다.”


원우의 굳은 얼굴에 순자는 말을 거두었다. 오래 교우한 지기여도 속내를 함부로 단정할 순 없는 법. 오래 고여서 기어이 곯아버린 고통스러운 마음이라면 더더욱.


“설진아 씨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진 차차 알게 되겠지. 한동안은 지켜봅시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배려할 순 있지 않겠나. 자네에게도 그이에게도.”


파르르 원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원우는 차올랐던 말을 애써 삼켰다.


예. 환생이었길 바랐습니다. 놀랐습니다. 속도 없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이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반대편에 그가 죽어버렸진실이 존재합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마음입니까. 그가 그토록 죽기를 바란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저는, 저를 경멸합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깊은 밤, 카멜리아 싸롱.

축음기에서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가 흘러나왔다. 홀로 남은 원우는 벽에 걸린 샤갈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빨간 바닥 위로 둥실 떠오른 두 사람.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게 입 맞추는 진녹색 옷을 입은 남자. 영혼처럼 바람처럼 그녀 곁을 휘돌며 입 맞추는 남자.


원우는 동백역에서 마주쳤던 설진아를 떠올렸다. 진녹색 스웨터에 검은 코트와 빨간 목도리가 겹쳐지던 그때, 설진아를 안아보았던 순간. 너무도 익숙하게 품에 안겼던 작은 몸, 그녀의 빨간 목도리와 발그레한 얼굴, 크고 동그란 눈, 원우를 꿰뚫어 보던 새까만 눈동자.


원우는 회중시계를 열었다. 11시 59분. 멈춰버린 시계 덮개 안 흑백사진. 사진 속엔 지금의 원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웃는 원우가 있었다.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원우의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설진아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시간이 멈춘 시계 안에서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감싸 안은 눈인지 빛인지 모를 온통 하얀 풍경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간판 ‘까멜리아 싸롱’.


“한겨울 손잡기. 장갑은 필요 없어요. 원우 씨 손이 따뜻하니까.”


홍도야.

켜켜이 쌓인 시간이 세월이 되었다. 회중시계처럼 멈춰버린 원우의 심장은 오래도록 죽어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쿵쿵 울릴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원우는 혼란스러웠다. 내내 홍도를 기다렸다. 홍도가 한평생 복을 누리고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로 찾아온대도 원우는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백 년을 살아도 아름다울 거라고. 그러니 부디 백 년을 평안하게 살기를. 홍도가 진정 행복하길 바랐다. 생전 자신을 기다렸을 홍도가 떠나는 길 쓸쓸하지 않도록, 자신은 여기서 내내 기다렸노라고 비로소 안아주고 함께 떠날 밤을 상상했다.


허나 헤어졌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원우가 선물했던 빨간 목도리를 둘러맨 채로. 홍도가 돌아온 걸까. 설진아는 홍도의 환생일까. 그토록 기다리던 홍도는 환생했다가 결국 다시 죽어서 돌아온 걸까. 창창할 나이에 아름다울 시기에 왜 벌써 죽어야만 했을까. 설진아의 기록부터 읽어내야 했다.


설진아가 버리다시피 반송한 상자를 붙잡았다. 망자의 허락 없이 먼저 열어선 안 되는 봉인된 기록. 하지만 설진아의 인생을 샅샅이 읽어본다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열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심하던 원우는 상자를 열었다.


설진아 偰眞我 


덩그러니 설진아의 인생책이 들어 있었다.

원우는 책을 꺼내 펼쳤다.


"이런."


외마디 탄식이 새어 나왔다.

모든 페이지가 텅 비어 있었다. 기록 없는 최초의 망자였다.



윤심덕, 사의 찬미




                    

이전 05화 진실도 작게 말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