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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09. 2023

까멜리아 심야 기담회

소설 [까멜리아 싸롱] 8화

동백섬의 밤.

오랜만에 눈이 그치고 청량한 밤하늘에 환한 달이 떠올랐다. 만월이었다. 보름달 아래 반짝, 노란 조명을 밝힌 까멜리아 싸롱.     


“훌륭한 나무군요.”     


응접실에 우뚝 솟은 크고 탐스러운 구상나무를 올려다보며 여순자와 박복희는 감탄했다.      


“예쓰 마담. 곧 크리스마스지 않습니까. 지호 군이랑 숲에서 살짝 옮겨와 봤습니다. 하하하.”

“어쩜, 완벽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되겠어. 복희 씨, 이 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걸 거예요.”

“근사하네요. 영화에서나 보던 크리스마스트리예요. 근데 이걸 둘이서 옮겼다고요?”     


마두열 곁에 안지호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옆에서 거들기만 했어요. 두열 아저씨 이 세상 괴력이 아니에요. 혹시 마두열 아저씨 히어로인가요? 헐크 같은? 아니, 산 사람은 아니니까 토르 같은 히어로인가?”

“그 초록색 괴물이랑 망치 들고 다니는 긴 머리 아저씨? 핼러윈 다가오면 백화점에 애들이 죄다 따라 하고 다녔지.”

지호군, 마두열에게 반한 것인가.”


울끈불끈 근육이 도드라진 가슴팍을 팡팡 두드리며 우쭐해하는 두열 옆에서 유이수가 새초롬히 대꾸했다.

    

“그나마 신문물을 접해본 신참 직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여기 사람들은 헐크나 토르를 몰라요. 본 적이 없으니까. 음... 뭐랄까. 쉬운 이해를 위해 한국적 재해석을 해보자면요. 두열 아저씬 임꺽정에 매우 유사한 관상이죠.”

“이수 너 이 녀석!”

“아하하. 그러네, 그러네. 우락부락하니 마두열 씨는 임꺽정 상이었구나.”

“그래도 우리 아저씨가 훨 귀엽습니다. 어쨌든 두열 아저씬 히어로 맞아요. 전생에 사람들 많이 구했으니까.”     


이상한 대화가 오가는 여기는 까멜리아 싸롱. 그리고 웃으며 얘기하는 이들은 세상을 떠나온 망자들이었다. 여러분은 모두 죽었습니다. 진실을 접한 웰컴 티타임 이후로 처음으로 망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무섭거나 음산하긴커녕, 싸롱 안에는 따스한 온기와 들뜬 생기마저 넘쳐흘렀다. 밤하늘에 꽉 찬 만월의 기운인 걸까.


창밖에 달을 올려다보던 설진아는 창가에 놓인 피아노에 시선이 머물렀다. 서늘한 피아노 건반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조용히 이수가 다가왔다.      


“언니, 쳐봐도 괜찮아요.”

“내 기억으론 난 피아노 칠 줄 모르는 것 같은데.”

연주가 아니어도 그냥 만져봐도 괜찮다는 얘기예요. 눌러봐야 소리가 나니까.”

“넌 참 멋지다. 이수야.”

“에? 제가요? 왜요?”

“그런 게 있어. 우리가 전생에 만났다면 난 널 참 좋아했을 거야.”  

“언니도 참. 또 모르죠. 우리가 전생에 만났었는지도.”     


진아는 힘주어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 오래된 피아노였지만 깊고 묵직한 감각과 진동이 손끝에 느껴졌다. 낯설지만 자유롭고 이상하지만 편안한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느낌. 마치 이 공간처럼. 도레 도레. 진아는 마음을 열고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러보았다. 그런 진아를 지켜보던 지원우 구창수에게 물었다.      


“창수 씨, 혹시 축음기 만져본 적 있습니까?”

“아뇨.”

“이 축음기, 아마도 창수 씨와 동년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루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오늘은 이 노래가 좋을 것 같거든요.”     


원우는 우스꽝스럽지만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기괴한 장난감 병정 그림이 그려진 LP를 꺼냈다. 흠흠. 헛기침으로 대답하는 뚝뚝한 창수에게 원우는 축음기 작동법을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레코드판이 돌아갈 때 조심스럽게 바늘을 올리면 됩니다.” 뭉툭한 창수의 손은 예상과 달리 날렵하고 섬세하게 축음기를 작동시켰다. “아주 잘하셨어요. 역시 장인의 손길은 다르군요.” 창수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자 원우가 웃었다.     

 

“저는 인생책을 읽는 사서니까요. 구창수 씨의 인생책도 완독했습니다. 앞으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언제든 찾아 들으시면 됩니다.”     


팔각나팔 원통에서 지지직거리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 감성 가득한 환상적인 분위기의 클래식이었다. “뭐야, 원우 씨.” 순자가 원우를 돌아보며 흘겨보았다. “Tchaikovsky 차이코프스키 <The Nutcracker 호두까기 인형>입니다, 마담.”


“좋습니다. 오늘 분위기에 적격인 주제곡이네요. 여러분, 오늘 이상하게 기분이 좋죠? 이승의 시간으로 오늘은 동지. 일 년 중에 가장 긴 밤, 게다가 꽉 찬 만월이라니. 그야말로 음기가 가득한 망자들의 밤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어요. 까멜리아 심야 기담회를 엽니다.”

“망자들이 한데 모여 이상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밤새 나눌 겁니다. 고요한 밤, 이상한 밤. 귀신들이 모여 귀신 얘기 나누는 즐거운 밤이랄까요.”

“자, 오늘은 스페셜 나이트. 따뜻한 팥죽 먹으면서 밤새 무서운 얘기나 나누자고요.”     


순자와 원우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일단 팥죽부터 나눠 먹으면서요. 복희 씨가 도와줘서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었어요.”

“예스 마담.”

“복희 씨, 그새 여기 망자 다 됐네요.”      


모두들 김이 폴폴 나는 검붉은 팥죽 한 그릇씩. 걸쭉한 팥죽에는 눈알사탕 같은 새알이 몽글몽글 담겨있었다. 지호가 물었다.      


“귀신들은 팥 무서워하지 않나요?”

“예에? 제가 한 입 먹어보겠습니다, 지호군.”      


두열이 팥죽 한 숟가락 와앙 떠먹었다. 오물오물 천천히 씹으며 팥죽을 음미하는 두열. 으어엇! 순간 두열이 미간을 구기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선 가는 숨을 뱉었다.     


“... 너무 맛있어요.”

“팥 따위 귀신한텐 아무런 타격이 없어요. 앙증맞은 새알 좀 봐. 어서들 들죠. 팥죽.”

“예쓰 마담!”      


응접실에 둘러앉아 다 같이 따뜻한 팥죽을 떠먹었다. 맛있네요. 너무 맛있네요. 죽어서 팥죽을 먹어볼 줄은. 기묘하네요. 기묘하군요. 달콤하고 걸쭉한 팥죽에 쫀득한 새알 머금고 씹으면 씹을수록 다디달았다. 순자가 연신 감탄했다.     


“복희 씨 팥죽 어쩜 이래요?”

“아하하. 제가 소싯적 꽤나 알아주던 찬모였습니다. 아! 저 일하던 시장통에서 유명한 미미 할머니 얘기가 있었는데요.”

“미미 할머니요?”

“어머, 아무도 모르는구나. 미미 할머니.”

“모르는 얘기도 무서운 얘기도 까멜리아 싸롱에선 언제든 환영입니다.”

“자자, 미미 할머니가 누구냐 하면.”      


복희가 목소릴 낮추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시장통에 아주 유명한 만둣국집이 있었대요. 밤낮으로 손님들이 바글바글해서 문지방이 반들반들했다지. 그 집이 그렇게나 장사가 잘 됐다고. 여간 꼬장꼬장하기 그지없는 자그만 할머니가 차린 만둣국집이었는데요. 근데 참 희한한 게 할머니가 그리도 꽁꽁 숨어서 음식을 만들더래요. 자식들한테도 조리법 하나 알려준 적 없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둣국 비법이 너무너무 궁금한 거야. 그 집 할머니가 밤마다 만두피에 뭘 섞는다더라, 만두소에 이상한 게 들어간다더라. 국물에 뭘 탄다더라.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순 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 갑자기 픽 쓰러진 거야. 한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때부턴 ‘미미 미미... 미미 미미...’ 이상한 말만 하더래요.”     


미미 미미... 미미 미미...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할머니 목소리를 실감 나게 따라 하는 복희. 모두들 숨죽였다.     


“아니, 근데 할머니가 다시 일어나서 만든 만둣국이 완전 대박이 난 거야. 너무 맛있어서 손님들마다 ‘돌아가신 울 엄마가 해준 맛이에요’라며 막 울면서 돌아가더래.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 할머니를 미미 할머니라고 불렀대요. 근데 미미 할머니도 나이가 들었잖아. 미미 할머니가 이제 돌아가실 때 되니까 자식들이 식당 문 닫겠다 안 되겠다 싶어서 매달려서 물어봤대요. ‘어머님, 만둣국 비법 좀 알려주세요.’ 할머니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도 내내 그 말 뿐이야. ‘미미 미미... 미미 미미...’ 그러다가 딱 한 마디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자식들 다 쓰러졌다지. 그 후론 시장통에 불 꺼진 식당마다 미미 할머니가 홀연히 나타나선 말해준대요. 그 비법을.”     


미미 미미... 미미 미미...

어느새 이야기에 푹 빠진 이들을 둘러보는 복희의 가늘고 섬뜩한 목소리.     


“미미 미미.. 미미 미미... 미원!”     


와.

어이없는 침묵 속에 터져 나오는 탄식.     


“할머니들 미원 못 참지.”

“암. 감칠맛은 미원이지.”      


풉. 푸하하하. 복희와 망자들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그럴싸했습니까, 마담?”

“어쩜 좋아. 복희 씨,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네.”     


순자가 눈물까지 꾹 찍어 누르며 대답했다.

때마침 축음기에서 <호두까기 인형> ‘Dance of the Sugar Plum Fairy 사탕요정의 춤’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정말로 으스스한 이야기, 제가 하나 해드릴까요?”


이수가 입을 열었다.

달짝지근한 팥죽 내음과 달콤음산한 ‘사탕요정의 춤’이 흐르는 까멜리아 싸롱.

모두들 이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에요. 어떤 아빠랑 어린 딸이 있었는데요...”


The Nutcracker - 'Dance of the Sugar plum Fa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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