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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17. 2023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소설 [까멜리아 싸롱] 9화 - 심야 기담회

세상에서 가장 긴 밤.

달짝지근한 팥죽 내음과 으스스한 ‘사탕요정의 춤’이 흐르는 까멜리아 싸롱. 까멜리아 심야 기담회가 열렸다. 모두들 유이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에요. 어떤 아빠랑 어린 딸이 있었는데요. 하루는 공원에 놀러 갔대요. 공원에서 한참 놀다가 벤치에 앉아 쉬는데 딸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거예요. 마침 건너편에 아이스크림 트럭이 보였어요. 아빠는 딸에게 잠깐만 짐을 지켜달라 하고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어요. 사실 아빠는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어요. 이 공원에서 아빠는 아주 기묘한 일을 겪은 적 있었거든요.”     


이수는 잠시 한숨을 몰아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가 어렸을 때, 이 공원에서 단짝 친구와 캐치볼을 하면서 놀다가 헤어졌대요. 그런데 그날 저녁, 친구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공을 줍다가 그만 미끄러져 죽어버린 거예요. 다음 날, 친구가 죽은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벤치에 앉아 괴로워하던 아빠 발밑으로 데굴데굴. 캐치볼 하던 공이 굴러오더래요. 그래서 공을 주웠는데 그 순간, 죽었던 친구가 다시 눈앞에 서 있는 거예요. 친구가 죽기 전 어제의 공원으로 돌아가게 된 거죠.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친구를 구해야죠.”

모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래서 아빠는 친구를 구했어요. 계단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같이 계단을 내려가 친구와 웃으며 헤어졌어요. 친구를 살렸다고 안도했죠. 그런데 그날 저녁에 전화가 걸려 왔어요. 친구가 집에 가던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이번에도 친구는 죽고 말았어요. 그리고 다음 날, 공원 벤치에 괴로워하며 앉아있는 아빠에게 다시 데굴데굴. 공이 굴러왔어요.”     


“설마. 또다시?”

진아의 물음에 이수가 고갤 끄덕였다.     


“맞아요. 굴러온 공을 줍자 다시 친구가 눈앞에 서 있고. 아빠는 다시 친구를 구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친구를 구하려고 애를 써도 친구는 계속 죽는 거예요. 아무리 애를 써도 점점 더 큰 비극으로 죽게 되죠. 다시 또다시 노력해도 친구를 구할 수 없었어요. 결국, 집에 불이 나서 친구의 가족들까지 모두 죽어버렸을 때, 아빠는 깨달았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다음 날, 다시 눈앞에 나타난 친구에게 아빠는 울면서 소리쳐요. ‘미안해. 아무리 해도 안 돼. 정말 미안해.’라면서요. 원래대로 친구가 계단에서 떨어져 죽은 다음 날, 아빠는 더 이상 공을 줍지 않았어요.”     


깜깜한 밤에 유령처럼 반짝이는 ‘사탕요정의 춤’. 신비로운 선율이 흐르자 이수의 이야기가 더욱 오싹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시간을 돌이킨다 해도 소중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이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 슬픈 기억을 잠시 떠올리면서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 왔어요. 이제는 예쁜 딸도 곁에 있고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빠와 딸은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죠. 그런데 아이스크림을 먹던 딸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더래요. 딸이 울면서 그래요. 아빠, 미안해. 아무리 해도 안 돼. 정말 미안해.”     


안타까운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딸도 똑같이 아빠를 계속 구했던 거죠. 그날 아빠는 죽게 될 운명이었고. 아무리 시간을 돌이켜도 아빠를 구할 수 없다면. 자, 이젠 어쩌면 좋을까요?”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슬프죠? 이 얘긴 정말 너무 슬퍼요. 전생에 제가 어떤 소설에서 읽었던 이야기였어요. 사실 원래 책엔 딸은 등장하지 않아요. 이건 그냥... 제 얘기예요. 제가 여섯 살 때, 겨울이었어요. 오늘처럼 깊은 밤이었고. 저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마구 울었요.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죠. 그날따라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없었고. 아빠는 다음 역까지 걸어갔죠. 드디어 제가 좋아하 아이스크림을 발견하곤 아빠는 바닐라 초코 딸기맛까지 모두 사들고 돌아왔어요. 영하의 겨울밤, 강추위에 길이 얼어붙었고. 마침 과로에 졸던 트럭 운전사가 그 길을 지나고 있었어요. 졸음운전에 비틀거리던 트럭은 빙판길에 미끄러져 순식간에 아빠를 덮쳤죠. 아빠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한가득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어요.”     


지금껏 환하게 웃으며 햇살처럼 주위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던 이수. 이수의 그늘진 얼굴이 흔들렸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려 아빠를 구해봤어요. 겨울이 아니었다면, 밤이 아니었다면, 바닥이 얼어붙지 않았다면, 트럭 운전사가 졸지 않았다면, 아이스크림이 어느 가게든 있었다면, 아빠가 집을 나서지 않았다면. 결국, 내가 아이스크림 때문에 떼쓰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빠는 죽지 않았을까. 수백 번 시간을 다시 돌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돼요. 저는 아빠를 구할 수가 없어요. 아빠와 헤어진 때가 고작 여섯 살이라서, 아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거든요. 나 때문에 아빠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어쩌다 꿈에 아빠 같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빠, 미안해. 아무리 해도 안 돼. 정말 미안해.’라며 울었어요. 저한텐 그게 유일했어요.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기회가.”     


박복희는 얼굴을 묻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유, 미안해요.” 속삭이면서. 순자와 두열, 원우는 이미 알고 있었던 이수의 이야기를 다시 말없이 들어주었다. 울먹이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용기 있는 이수를 바라보면서. 진아가 이수를 마주 보았다.     


“이수 잘못이 아니야. 아빠를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여섯 살짜리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마음도 잘못이 아니야. 내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수가 해준 이야기 속에 딸이었다면, 그래도 다시 한번 아빠를 만나러 갈 거야. 꿈에라도 아빠를 만나러 갈 거야. 아빠를 만나면, 같이 벤치에 앉아서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아빠에게 한 번이라도 더 환하게 웃어주고, 한 번이라도 더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딸에겐 최선이지 않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단 하루라면 웃으면서 보내고 싶어. 타인의 인생을 구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도 구하고 싶어. 아빠도 그러길 바라지 않으셨을까.”     


돌처럼 꿈쩍없이 앉아있던 구창수도 말을 보탰다.     


“나도 딸을 키워봤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오늘 죽을 거란 사실보다 딸애가 우는 게 더 슬펐을 겁니다. 마찬가집니다. 이수 씨의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딸을 걱정했을 겁니다. 꿈에서나마 딸을 만난다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겁니다.”     


왈칵, 이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맙습니다. 그런 마음을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어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얘기였거든요. 그래도 제가 죽어보니까. 까멜리아 싸롱에 와서 죽은 이들을 만나보니까. 이상하게 안심이 돼요. 우리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으니 분명 까멜리아 싸롱처럼 좋은 곳에 머물다 갔을 거예요. 가혹한 죽음이 아빠를 덮쳤지만, 아빠가 저를 사랑했단 진실만은 아무리 시간을 돌이켜봐도 변하지 않더라고요.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고마운 마음으로 기울었어요. 아빠도 그걸 원하지 않았을까.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더라고요.


이수가 훌쩍거리며 웃었다.


마음은... 정말 이상해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것 같거든요. 우스운 말이지만 전 아직도 제가 죽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나는 누구인지, 여긴 어디인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주위에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하지만 이제 제 마음만은 제대로 알 것 같아요. 마음이 있어서 내가 '유이수'라는 고유한 존재구나 알아요. 기쁘고 슬프고 미안하고 아프고 고맙고 즐겁고. 이런 마음들을 죽어서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수 아버님이 오셨다면 객실장이 최고급 이불을 마련해 드렸을 거야. 그것도 꼭 알아야 한다.”

마두열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때, 복희가 투박하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너무 울어버려서 죄송해요. 저도 딸을 키워봤습니다. 세상 어떤 보배보다 귀하고 예쁜 딸을... 저였다면 다행이라고 기뻐했을 거예요. 딸이 아니라 내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아무리 시간을 돌이켜봐도 죽을 운명이라고 했죠. 하지만 만약에 내 딸이 죽을 운명이라면, 저는 가만 안 둡니다. 우리 두 사람 쇠사슬로 칭칭 감아서라도 딸애를 업고 다닐 거예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결국 죽어버릴 운명이라면 같이 죽을 겁니다. 죽는 순간까지 딸애를 끌어안고 지켜줄 겁니다. 내 새끼 절대 혼자 죽게 못 둬요. 저는 죽는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내 새끼 아플까 봐 아파서 울까 봐 그게 무섭습니다. 부모 마음은 그래요.”     


축음기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멈췄다.

고요했다. 잠시 아무 없는 고요하고 기묘한 침묵.     


“천사가 지나갔네요.”      


여순자가 읊조렸다.     


“프랑스에선 대화 중에 잠시 고요한 침묵이 찾아올 때 ‘천사가 지나간다’라고 한대요. 우린 어떤 존재일까요. 우린 어디쯤 머무르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린 어디로 갈까요. 중천을 지키는 이 늙은이조차 생과 사, 이 불가해한 세계를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삶도 죽음도 가혹한 운명도, 그리고 우리도 지나갑니다. 우린 우리 주위를 둘러싼 것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요. 단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죠. 그러나 잠시 천사처럼 고요하게 침묵하며 들어줄 순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인간도 귀신도 천사도 아닌 우리들. 오늘 밤 여기 함께라이 다정한 위안이네요.”     


“고요한 밤, 기묘한 밤. 천사가 지나가는 밤이네요. 마담, 노래를 바꿔볼까요?”

“좋죠, 원우 씨.”      


지원우가 서가에서 노래를 고를 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안지호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안경 코를 고쳐 올렸다.     


“저도...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 작가의 말

소설 <까멜리아 싸롱>에 인용된 이야기 원작

유이수의 이야기 : 슈카와 미나토 단편집 <도시전설 세피아> ‘어제의 공원’


유이수의 이야기는 슈카와 미나토 단편소설 ‘어제의 공원’이 원작입니다. 무섭지만 기묘하고 슬픈 이야기를 쓰는 일본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책들을 좋아하는데요. <도시전설 세피아>만 절판되어 읽어보지 못했어요. 이 책 읽어보신 분들, 소장하신 분들 넘넘 부럽습니다.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와 방송 <심야 괴담회>에 나온 ‘어제의 공원’ 이야기를 모티브로 유이수의 이야기를 재현했기에 책의 내용과는 또 다를 거예요. 책에는 딸이 등장하지 않고 아내가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학교 다닐 때 따라다니던 괴담처럼 무서운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니까. 여러분에게도 무서운 이야기를 전하는 마음으로 ‘까멜리아 심야 기담회’를 만들어 보았어요. 무서운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슬프디 슬픈 인간들의 이야기더군요. 이젠 귀신보다 인간더 무서워하는 어른이 되었어요. 불가해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처럼 고요하고 묵묵하게 들어주는 안전한 순간이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야말로 까멜리아 싸롱에 가보고 싶네요.


참, 8화에 박복희의 ‘미미 할머니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셨을 거예요. 저희 엄마가 해준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 만든 이야기거든요. 연재 마지막화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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