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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28. 2023

나는 고아한 인간이에요

소설 [까멜리아 싸롱] 3화

인생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 버린다지.

설진아와 박복희, 구창수와 안지호. 네 사람이 눈 감은 사이 열차는 빠르게 달려갔다.     


“여러분, 사는 게 힘들죠. 그래도 우리 행복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을 보면 명확하거든요.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행복해야 해요.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안지호는 유튜브에서 진중한 목소리로 발언하는 안광일을 보았다. 유명 로펌 대표 변호사이자 각종 매체에 단골로 출연하는 안광일은 지호의 아빠였다. 수려하고 훤칠한 외모에 지적이고 정의로운 변호사. 9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애처로운 싱글대디의 사연까지. 도덕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안광일을 대중들은 좋아했다. 광일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재개발 이슈가 뜨거운 양미동이 속한 구청장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유력한 후보였다.     


지호는 농담을 섞어가며 젠틀하게 미소 짓는 광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지호는 아버지 광일의 눈코입을 그대로 닮았다. 웃을 때 가늘게 휘어지는 눈과 다정한 입매는 평소 친구들에게 짓는 표정과 똑같았다. 지호는 영상을 껐다. 스마트폰을 비행기모드로 바꾸고 가방 깊숙이 찔러 넣었다. 데이터, 전화, 메시지. 시끄러운 세상과 뚝 단절되고 싶었다. 여느 때처럼 가장 먼저 도착한 빈 교실. 줄 이어폰을 끼고 CD플레이어를 재생시켰다. 낡은 CD플레이어는 엄마의 유품이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책상에 엎드렸다. 안지호는 궁금했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행복. 행복이란 대체 뭘까.      



“이봐요, 구 씨. 구 씨 할아버지. 12월에 계약 연장해야 할 텐데 이렇게 빠져서 되겠어요? 길바닥에 대체할 노인들 차고도 넘쳐. 좀 사근사근 인사하고, 빠릿빠릿 움직이라고요. 아니, 입주민들 자꾸 민원 들어와. 구 씨 할아버지 무섭대. 좀 웃고요. 친절하게.”     


구창수는 엊그제 동대표 자가용이 들어오는 걸 발견하지 못하고 늦게 차량 차단기를 올렸다. 동대표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버지뻘인 창수를 세워두고 협박 섞인 충고를 쏟아냈다. 동대표는 차량 차단기 앞에 서서 하루치 외부 차량 방문증을 수기로 발급하라고 지시했다. 창수는 언제 들어올지 모를 방문 차량을 종일 서서 기다렸다. 칼바람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그저께의 수치를 창수는 잊었던가. 잊지 못했던가. 아니, 그건 그제가 아니었던가.     


고용 계약이 만료되는 12월은 특히나 마음 졸이는 달이었다. 일흔이 넘어도 유일하게 이력서 받는 곳은 경비일 뿐. 동대표 말처럼 대체할 노인들은 차고도 넘친다. 돈. 돈 벌어야지. 먹고살려면 돈 벌어야지. 3개월짜리 고용 계약서가 창수에겐 수치보다 중요했다. 칠십 평생 나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창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단순해지자. 나는 돌이다. 돌처럼 단순해지자. 졸음이 몰려왔다. 구창수는 자고 싶었다. 내일도 그리고 다음 날도 돌처럼 꼼짝하지 않고 자고만 싶었다.     



박복희는 어제 누군가 백화점 바닥에 토해둔 토사물을 치웠다. 대체 뭘 먹었는지 냄새가 고약했다. 하필 에스컬레이터 바로 아래였다. 쪼그려 앉아 걸레질하는 복희 모두들 찡그리며 지나갔다. 그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아이를 다그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너 공부 못하면 나중에 저 아줌마처럼 된다.”

“싫어. 더러워.”     


복희는 돌아보았다. 여덟 살쯤 되었을까. 똘망똘망 복스럽게 생긴 여자애가 명품백을 든 늘씬한 엄마 손을 잡고 있었다. 복희는 토사물을 닦던 걸레를 든 채로 모녀에게 다가갔다.     


“사모님, 제가요.”

“네?”

“제가 공부는 진짜 잘했는데요. 박복했어요.”

“아줌마, 박복이 뭐예요?”

“복이 없단 뜻이야. 애기야, 공부 암만 잘해도 박복하면 아줌마처럼 돼.”     


복희는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아이엄마는 새파랗게 질려 아이 손을 잡아끌고 지나갔다. 모녀가 지나가고도 복희는 걸레를 들고서 하하하 웃었다.     


복희는 원래하하하 소리 내 웃길 좋아하는 호쾌한 여자였다. 손맛도 좋아 야무지게 음식도 잘해 나눠 먹고, 붙임성도 좋아 따르는 언니동생들이 수시로 전화 걸곤 했는데. 그랬던 복희가 언제부턴가 조용해졌다. 시들어버렸다.      


지친 하루의 끝,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랑 따뜻한 밥을 지어먹고 싶었다. 복희가 아는 유일한 행복은 그랬다. 하지만 복희는 안주도 없이 홀로 소주를 마시는 밤들이 많아졌다. 소파에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온몸에 수분이 죄 말라버린 듯 푸석푸석했다. 눈물마저도 다 말라버렸다. 그럴 때마다 “보배야.” 대답 없는 딸아이를 불러보았다. 우리 보배는 소주 냄새 질색할 텐데, 그치. 복희는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집을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정처 없이 걸었다. 잠시라도 쉴 곳이 없었다. 박복희는 하루라도 발 뻗고 쉬고 싶었다. 다 내려두고 그만 쉬고 싶었다.     



“나는 고아예요. 내가 나를 키웠어요. 난 고아(孤兒)가 아니라 고아(高雅)한 인간이에요. 내 높은 뜻과 품격은 전부 돈이에요. 돈 필요해요, 나.”     


설진아는 거울 앞에 서서 말해보았다. 기내 방송하는 승무원처럼 활짝 웃으며 또박또박 말해보았다. 진아는 고아였다. 내가 나의 부모가 되어 살아온 여자. 일찍이 눈치 빠르고 세상 눈 밝은 현실적인 스물다섯이었다.      


만 18세. 보호 조치가 종료되던 겨울, 진아는 정착지원금 500만 원마저 위탁가정 부모에게 뺏기고 양미동에 숨어들었다. 수중엔 알바로 모은 150만 원이 전부였다. 매달 지급되는 자립지원금 30만 원으론 생계가 빠듯했다. 볕 하나 들지 않는 창문 없는 고시원 방을 전전하며 진아는 나날이 가난해졌다.


진아는 잘 자라고 싶었다. 변두리 밖으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볕을 쫴야지. 온기가 느껴지는 환한 볕. 볕다운 볕을 쬐려면 양미동을 떠나 도시로 가야지. 돈. 돈이 필요했다. 돈만 있다면 환하고 따뜻한 볕을 마음껏 쬘 수 있을 테니까. 진아는 자기 자신을 키우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하고픈 공부는 있었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공부보다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혈혈단신 곁엔 아무도 없었으므로, 정상적인 대출마저 불가능했으므로. 진아는 혼자 숨만 쉬고 살아도 세상엔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것 말곤 아는 게 없었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무작정 살아남기 바빴다. 주위에 도움을 구할만한 어른도 없었지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용기였다. 평생 버림받으며 살아온 진아는 용기보다 거절이 두려웠다. 도움을 구했을 때, 나이와 태생을 들먹이며 들어야 할 조언과 질책, 거절이 싫었다. 차라리 혼자 견뎌내고 말지. 애초부터 혼자였으니까.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온갖 알바를 전전하며 생계형 미소를 장착했다. 속도 없이 악착같이 웃었다.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선 웃음이 무기였다. 생활밀착형 알바 요령과 사내 텃세와 진상 갑질에서도 유연하게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그래도 여전히 돈은 없었다. 고졸에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에겐 겨우 손에 잡히는 돈이 전부였다. 이 돈이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진아의 현실이자 미래. 가끔 숨이 턱턱 막혔다. 세상에 나 하나 온전히 책임지는 게 이다지도 버겁다니. 이런 게 인생이라니. 돈 돈 돈. 돈에 집착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루는 사전을 찾아보았다. 검색어 ‘고아’.      


고아(孤兒) :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

고아(高雅) : ‘고아하다’의 어근.      


‘고아하다(高雅하다)’를 이어 찾아본 진아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뜻이나 품격 따위가 높고 우아하다’. 이제 진아는 어딜 가도 활짝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 보고 설진아는 재차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나는 고아(高雅)한 인간이에요. 돈 필요해요. 돈 벌어야 해요.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동백, 동백역입니다.]    


열차 안내방송이 진아를 깨웠다. 동백역? 낯선 이름이었다. 진아는 눈을 떴다. 갑자기 너무 환한 빛이 쏟아져 눈을 찔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야가 잠잠해지자 맞은편 창문이 보였다. 새파란 하늘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맑은 하늘에 눈이 펑펑 쏟아지다니. 아슴아슴한 정신이 채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비비고 제대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엔 새파란, 바다가 보였다.      


바다?

열차는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거센 포말을 일으키며 힘차게 달리는 열차. 열차는 틀림없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바다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미역에서 같이 열차를 탄 아주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진아는 맞은편 뜨개 모자를 눌러쓴 복희에게 소리쳤다.     


“이거 꿈이에요?”

“이거 꿈이라고요?”

“아뇨. 이거 꿈, 맞냐고요.”

“아아. 이거 꿈, 맞다고요. 아아!”     


왕왕거리는 열차 소음에 대화가 불가능했다. 폰. 내 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기기는 꺼져 있었다. 진아는 양볼을 힘껏 꼬집어 봤다. 아프다. 진짜 아프다. 꿈에서 안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꿈에서 깨야 해. 나 출근해야 된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제멋대로 덜컹덜컹 흔들리며 달리는 열차. 창문에 이마를 찧은 진아는 구겨진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차가 바다 위를 달린다. 눈 깜짝할 사이 어디까지 온 걸까.

저 멀리 바닐라 아이크스림 한 스쿱 떠 놓은 것처럼 희고 둥근 섬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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