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한정적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퇴사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되어간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식탁을 함께 한 후 첫째, 둘째를 학교에 보낸다. 여기까지는 퇴사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부터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어색하다. 텅 빈 스케줄이다.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시간.
그렇다고 딱히 시간이 많아진 느낌은 아닌 것이 셋째가 열심히 집을 기어 다니며 집안을 헤집고 있고, 지금까지 회사 다니느라 조금씩 밀어냈던 집안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맡아주기를 기대하는 아내의 서슬 퍼런 기대감(?)은, 집안 전체의 기운이 되어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무미건조할 수도 있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일주일이 흘러가는 속도는 퇴사 전과 후가 큰 차이 없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지만,
명확하게 큰 차이점이 있다면 소득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누구도 내가 흘려보낸 시간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내가 선택해서 쓰는 시간도 물론 가치가 있겠지만 (이건 내가 그렇게 믿는 것일 뿐), 직장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보다 가치 있게 여겨지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퇴사 후 이 '시간의 무게'를 몸으로 뼈저리게 느낀다.
회의 후 동료와 마시던 커피 타임, 엘리베이터 기다리며 보던 짧은 웹툰, 미팅시간에 늦는 고객을 기다리며 잡담 나누던 카톡 등 짧은 시간들이지만 어차피 그 시간조차 월급에 포함되니까 그 시간이 은근한 쾌감을 느끼게 해 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들은 모두 나에게 비용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이런 시간들이 모여 그저 아무런 가치 없이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시간의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지시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텅 빈 나의 시간을 무언으로 채울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1) '마인드마이너' 송길영 작가가 '호명사회'에서 제안했던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고 해 봐야지'라고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거 해서 지금 우리 가족 책임질 수 있어?"라는 현실적인 질문이 붙는다.
2) 그렇다고, 지금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러면 육체적인 일 또는 반복적인 일일 텐데, 이렇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에 페이도 낮고, 장기적으로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하려고 퇴사했냐?라는 생각이 뼈저리게 든다.
다시 나에게 질문해 본다. 끝까지 퇴사를 굳이 해야 되나 고민하던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나를 결정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벌써 6년 전이다. 데이터과학자를 채용하기 위해 미국에 채용설명회를 갔을 때, 당시 졸업을 앞둔 후보자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물어봤던 질문 중 2가지가 있었다. 당연히 연봉이나, 좋은 처우조건 같은 것일 것 같지만, 오히려 그들이 물어보는 것은 장소와 시간이었다. 예를 들면, "굳이 사무실에 나와서 일해야 되나요?" "저는 새벽에 집중이 잘 되는 편인데, 이런 것도 고려해 주시나요?" Covid 이후에야 이런 2가지가 유연해진 편이지만, 당시는 covid 이전이었기 때문에 한국 공기업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데이터과학자가 막 등장하던 당시였지만, 그 후 실력 있는 데이터과학자를 채용하기 위한 글로벌기업들의 소위 '인재전쟁 (War for Talent)'이 벌어졌고, 그들의 전문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장소와 시간을 자유롭게 허용해 주는 것은 '복지'라기보다는 당연한 '규범'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깨달았다. 스페셜리스트는 장소와 시간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구나.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겠다" 공기업 직원들은 대부분 제너럴리스트를 표방하고, 특히 HR 부서는 더더욱 제너럴리스트로서 소통, 협력을 강조한다. 그런 제너럴리스트의 집단인 HR 부서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데이터과학자가 나에게 큰 해답지였다. 데이터와 통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자신의 도메인 지식을 갖는 것이 데이터과학자라면, 나도 HR 분야에서 데이터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회사에서 부지런히 HR 분석 관련 프로젝트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으면서 미국 데이터사이언스 석사과정도 회사의 지원으로 감사하게 마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나를 아껴주시던 부장님 밑에서 HR Analytics를 담당하게 됐을 때, 단 한 가지 요청했던 사항은 '시간'이었다. "부장님, 야근하는 팀원들 못지않게 성과는 보장하겠습니다. 단지 칼퇴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변에서 얘기가 나오더라도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것은 HR에서도 스페셜리스트가 되면서 '시간'을 얻고 싶다는 나의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세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들과의 시간과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고 싶은 나의 간절함이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들과의 저녁식탁을 2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지켰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하루동안 소모했던 에너지들이 채워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면, 항상 머리가 신선했고, 주어진 프로젝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부장님은 함께 근무하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칼퇴하는 것에 대해 나에게 별도로 언급하지 않으셨다. 회식 자리에서나, 다른 팀원들 사이에서 내 얘기가 나왔다는 얘기가 들렸지만, 부장님께서 흔들림 없이 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신뢰해 주셨고, 나도 그날 끝내지 못한 일들은 집에서 원격으로 접속해서 새벽까지 끝내기도 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갔고, 스페셜리스트로서 성과중심의 업무가 어떤 것인지를 증명해 나갔다.
그동안 HR Analytics 혹은 People Analytics라는 주제가 HR에서 화두가 되기도 했고, 점차 내가 속한 회사에서도 여러 사례들을 만들어내면서 HR 콘퍼런스 혹은 해외 콘퍼런스에서도 발표할 기회가 생겼고, 특허를 내기도 했다.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데이터사이언스를 공부하면서 HR Analytics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됐고, 가족과의 시간, 자기 계발의 시간도 차례차례 생기게 됐던 것 같다. 결국 퇴사를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시간'이다. 이제는 더 많은 시간으로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가 되는 일로서 연결되면 좋겠다. 지금은 HR analytics를 통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데이터로 찾아주는 일도 의미가 있을것 같다.
누가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누구는 그렇게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 줄 알어? 조직이 있어야 너가 있는 거지. 다 너 같이 일하면 소는 누가 키워? "
맞다. 완전 동의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 안정적이고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우직하게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 조직에 정말 필요하다. 그렇게 나도 살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불안정하더라도 변화를 추구하고, 성장과 배움을 추구하는 것에 더욱 재미를 느끼고, 그 반대의 경우 오히려 삶에 의욕이나 동기가 떨어진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정말 특별한 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조직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 같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여러 가지 명언이 있지만, 그중 '시간의 무게'를 생각하게 만드는 명언이 있다.
"너의 시간은 한정적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기 위해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30대 중반. 이것이 나의 퇴사 이유이고,
내가 선택한 '나의 시간'에 대한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
HR 도메인에서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스페셜리스트로서 꾸준히 축적할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내 시간을 관리하고, 내 일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
가족을 케어할 수준이라면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다. 시간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에 가치 있게 쓰면서, 커리어를 성장해 나가고 싶다.
고민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