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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빵장수 Jun 09. 2022

아프다고 잘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

오미크론과 함께하는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아픔과 가난 에피소드



 한국 사람들은 고통을 드러내는 것에 은근 소극적이다. 사건의 발단은 할머니의 전화. 할머니한테 요 며칠간 안부 전화를 하는 가족들의 통화를 방 안에서 주워들으며 느꼈다. 왜 가족들은 별일 없이 늘 행복하게 안부를 전할까? 미련한 작은 딸이 코로나에 덜컥 걸렸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별일 없는 척하는가. 나는 어엿한 확진자인데! 삼시 세 끼도 다 각자 방에서 먹는 요상한 풍경인데!


오만프로 제 책임입니다


 할머니 댁에 거는 안부 전화는 루틴처럼 언니와 내가 돌아가면서 한다. 그런데 요 며칠간 발신자의 목소리에서 제외되어 있는 내가 수상했는지 할머니는 내게 직접 전화를 거셨다. 일요일 저녁, 내일 출근 잘하라고 말하셨는데 괜히 혼자 마음 한켠에 티 내고 싶어 심통 나서는 "아뇨 저 내일 출근 안 해요 코로나 걸려서"라고 말해버렸다. 할머니는 평온한 일요일 저녁에 확진 사실을 고백하는 손녀에게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는 아빠에게 따로 전화로 자초지종을 물었단다. 아빠는 왜 굳이 말했냐고 내게 물었는데 그럼 뭐 어쩐다나.


아프다고 매끄럽게 잘 말하기 실패!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대학교 3학년이란 지나치게 어린 나이임에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혹독한 한국 사회의 대학생이었다. 동아리를 매일 지나치게 성실하게 했고, 그 동아리는 대학 방송국이었다. 하루는 녹음 스튜디오 천장에 달린 조명 청소를 한답시고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먼지를 꼼꼼히 털고 내려왔다. 쿵. 그게 원인이 되어서 염증이 났는데, 몸이 어찌나 신기한지 청소를 하고 별일 없이 하교하는데 발이 갑자기 너무 아파서 못 걸을 수준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방금 나왔는데? 우리 학교 본관을 나와 지하철역까지 천천히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먼 거리에 있고, 로데오 거리는 무조건 지나야 되는데 무조건 사람이 많다. 그 거리를 절룩절룩 거의 한 다리에만 무게를 실어서 걷는데 심란했다. 나를 힐끗 쳐다보는 시선도 신경 쓰이는데, 그 시선과 비교할 수 없이 병원 가서 진료도 받고 약까지 처방받기에 내가 너무 가난하다는 사실이 심란했다. 갑자기? 당시의 나는 학교 시간표 빈 곳을 테트리스마냥 쏙쏙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교 언론이라는 자부심 안에 숨어있는 수많은 노동량을 버티면서 장학금도 거의 매 학기 전액으로 받는데 그럼에도 돈이 없었다. 심지어 그놈의 대외활동도 쉬지 않고 10여 번을 했다. 공모전도 하고.


강렁뱅이 시절


 암튼 돈이 없는 내 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건 갑자기가 아니라 사실 디폴트 값이었다. 그 무렵 사실상의 큰 지출이 없었는데도 나가야 할 지출이 한 번에 몰려 똑 떨어진 상태였다. 부모님한테 용돈 받지 않는 생활이 나름 되도않는 긍지이자 자부심의 요소였는데, 암튼 다 모르겠고 당장 엄마한테 전화했다. 이거 이거 어디에 말 안 하면 내가 돈이 없어서 병원을 못 갈 상황이란 걸 아무도 모를 테니! 저널리즘 글쓰기 수업을 수강한 신방과 학생으로서 한 줄 헤드카피에 핵심을 담았다. "엄마 아픈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겠어."



 가난을 고백하면서, 내가 나의 가난을 못 이기고 엄마 손을 빌리는 게 실감이 나서 허무한데 후련했다. 내친김에 아빠한테도 서러운 딸내미의 부상과 축나버린 지갑 소식을 전하려 했으나 부재중. 엄마는 늘 의기양양했던 내가, 혼자 앞가림한다고 자랑스러워했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 용돈을 달라는 지경에 놀라서 부랴 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허나 우리 엄마는 젊고 똑똑한데 스마트 뱅킹을 못한다. 인터넷 뱅킹도 쓸라치면 노트북을 쓰고 있는 나 또는 언니가 있어야 한다. 엄마는 딸내미 병원 못 갈세라 냉큼 밖에 나와서 atm기로 달려가 5만 원쯤 보내줬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송금자명 대신 애칭인 ‘두꺼비’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소중한 돈을 모바일 속에서 와락 껴안은 채 근처 정형외과로 점점 더 절어오는 발을 끌고 갔다. 병명은 힘줄염. 얇은 신발 신은 채로 맨날 걸어 다녀서 생겼다는데 쿵 떨어지면서 그게 퍼졌단다. 무사히 치료를 받고 진료비와 약값을 내고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내려오는데, 마침 에스컬레이터도 없어서 계단을 한 발씩 폴짝폴짝 내려갔다.


언제 어디선가 무슨 일이(염증이) 터질지 모르는 인생사


염증 덕에 공강인 언니가 학교까지 부축해주고, 잔인하게 가파르기로 유명한 학교 언덕은 다친 사람을 위해 전동 휠체어가 다닌다는 사실도 알았다. 짧았던 어드밴티지를 뒤로하고 다시 광기 어린 성실함과 즐거움과 힘듦을 견디며 동아리와 대외활동과 공모전과 학교 생활과 아르바이트의 시간을 쌓아나갔다. 엉성하게 숨기며 가까스레 포장했던 빈곤은 금방 들통이 나고, 어디선가 조용히 곪고 있던 발바닥 속 염증도 작은 충격에 힘입어 밖으로 퍼져 나왔다. 숨기는 것보다 드러낼 때 빠르게 대처 가능한 문제도 있는 법이다. 그걸 알기까지가 오래 걸릴 뿐.


 그날 이후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졸업하고 회사원이 된 지금껏 용돈을 달라고 말한 적은 없다. 앞으로도 역시 없을 테고. 엄마는 그날을 되돌아보며 용돈 한번 달라고 안 하던 딸이 유일하게 대놓고 얼른 돈 좀 빌려달라고 한 날이라고 아직도 기억하는 동시에 마음 아파한다. 마음 아팠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또 안 좋다. 할머니는 신경이 너무 쓰인다며 몸은 괜찮나고 전화로 연신 물어보셨다. 암튼 사람은 아프면 괜히 나 아픈 것 좀 사람들이 봐주면 좋겠고 알아주면 좋겠는데 역시 너무 알리면 괜히 맘 아프다. 얼른 낫기나 해야겠다.


이글은 면목 없는 강오미가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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