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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an 26. 2024

"나는 왜 미루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까"

미루지 않는 습관은 계획에서 시작된다






       지난주 글쓰기 모임에서 '미루기'에 관한 동료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미룰 때마다 온몸의 세포는 고통을 느끼고, DNA에 기록을 해둔다'라는 한 줄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하루 이틀 미루다가 막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간혹 생기지만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데에 새삼 놀랐다. 그렇다고 미루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라는 슬로건을 재미 삼아 만들어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종종 미룬다. 하지만 미루기에 습관이 붙을 만큼 빈번하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루지 않는 습관'을 가졌다. 이런 나와 달리 미루기 습관의 스릴과 고통을 즐기는 분들이 내 주변에도 있다. 그분들의 나와 다른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나는 왜 미루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교실을 꽉 채운 아이들의 수많은 눈망울과 왁자지껄한 소리, 교탁을 앞에 두고 거인처럼 서서 내려다보던 선생님의 엄숙한 표정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여덟 살의 나는 깡마르고 왜소하고 허약했다. 입학하자마자 아파서 며칠 결석했고, 수업과 숙제는 부담 그 자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시골길을 걸어 통학하는 것도 체력에 부쳤다. 집에 돌아오면 낮잠으로 보충했고 저녁을 먹은 후 졸린 눈을 비벼가며 숙제했다. 어떤 날은 해 질 녘에 잠이 깨 새벽인 줄 알고 등교 준비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숙제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놀란 눈으로 공책부터 들여다봤다. 남은 숙제가 반듯한 언니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대신 숙제해 준 글씨체라며 벌을 주셨다. 당연했지만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꾀를 부린 것도 아니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기력이 딸리는 게 속상했다. 아이들 앞에서 벌을 받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다. 그날이 '마감시한' 있는 어릴 적 숙제 미루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가 지닌 체력의 한계와  학교생활의 쓴맛을 배운 것이다. 그 후로 집에 오자마자 숙제와 준비물 챙기는 것부터 시작했다. 방학 때면 일기를 제외하고 일주일 만에 할 수 있는 숙제를 모두 해치웠다. 미루지 않는 습관의 시작이었다.



       어릴 적 경험을 통해 나의 미루지 않는 습관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그 이면에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허약하게 태어나고 자라 더디긴 했지만 느리지는 않았다. 성격이 급하다는 얘기를 빈번하게 듣고 자랐다. 다른 집 아이들은 숙제를 미루다가 혼났지만, 나는 학교 준비물을 당장 준비해 달라고 서두르며 부모님의 화를 돋우었다. 시간 여유를 두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부모님이 제때 준비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앞당겨 재촉해도 하루하루 미뤄지는 변수가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며 미루지 않는 습관이 내 몸에 서서히 장착되었다.



       미루지 않는 습관은 계획에서 시작된다. MBTI의 'J형 인간'인 나는 스케줄을 짤 때 마감시한을 짧게는 3일에서 10일 정도 앞당겨 계획한다. 누군가와 약속이 되어 있거나 마감시한이 분명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계획의 선순환이다. 계획을 앞당겨놓고 그 안에서 미루기를 한다. 일하기 싫어서 미루고 아파서 미루고 급한 일이 생겨서 미루고, 앞당김 속에서만큼은 미루기의 달인이다. 앞당김 속의 미루기는 계획 안에서 습관이 되어 나름의 패턴을 유지한다. 단, '진짜' 마감시한 1~2일 전까지 마감을 끝낸다는 전제에서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계획적인가? 그 안에 나만이 아는 한 가지 부러움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솔직히 나는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감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막판 창의력을 발휘해 마무리 짓는 것도 체력이고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체력도 실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먼저 계획하고 먼저 걷는다. 이렇게 미루지 않는 습관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내일 할 일을 오늘 끝내고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즐거움이다. 눈앞에 앞당겨온 일들이 늘 대기하고 있지만 워밍업처럼 준비해도 되는 일들이라 심적 부담이 적다. 오늘 글쓰기 시간도 미리 생각해 놓은 글감과 날 것의 초고 위에서 문장의 그물을 촘촘히 짜며 고통스럽지 않게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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