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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Apr 05. 2024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법무사> 4월호 명문장으로 읽는 서평 연재

※<법무사> 4월호 '명문장으로 읽는 책 한 권'에 연재한 서평입니다.





https://ebook.kabl.kr/magazine/ebooks/202404/76/index.html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쪽)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긴 서사의 문을 연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딸)의 시선이다. 여느 소설과 달리 결말에 등장할 법한 아버지의 죽음을 만우절 유머 정도의 가벼움으로 툭 던진다. 그러고는 이내 “유머는 우리 집안의 금기였다.”(7쪽)라는 반전의 언어로 무게중심을 잡는다. 시대를 불문하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볍지 않다. 태아에서부터 내적 친밀감을 만들어 온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어느 정도의 무게와 거리가 있다. 그런 ‘아버지’가 시트콤처럼 유머러스하게 죽음을 맞는 전개로 말머리를 이끌며 호기심을 불러온다. 자신을 비롯해 가족과 시대의 짐을 짊어지고 살다 간 아버지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일까. 죽음으로 고통을 내려놓고 삶으로부터 해방된 것일까. 현대사의 비극이었던 해방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일까.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소설가 정지아가 써 내려간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살다 간 아버지의 박제된 세월을 수많은 관계의 에피소드로 풀어내며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간다.


소설가 정지아는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모교에서 전공전담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1990년에 부모님의 삶을 옮긴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로 데뷔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1996)가 당선됐고, 소설집 ‘행복’(2004)과 ‘봄빛’ (2008) 외 다수의 작품을 썼다. 단편소설 ‘풍경’으로 이효석문학상(2006)을, 소설집 ‘봄빛’으로 올해의 소설상(2008)과 한무숙문학상(2009)을 받는 등 다수의 상을 받으며 문학성을 입증받았다. 그리고 32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법’(문학평론가 정홍수)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98쪽)

 
이 소설의 배경은 구례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이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를 중심으로 얽힌 사람들의 웃픈 에피소드를 따라가며 해방 이후 70년 현대사의 굴곡진 삶을 풀어낸다. 시종일관 유머와 위트 속에 묵직한 주제를 담아 따뜻하고 뭉클한 감동을 건넨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누비며 혁명을 꿈꾸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 위장 자수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뼛속까지 유물론자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유물론자답게 죽음 뒤를 믿지 않는다. “죽으면 그걸로 끝인디 워디 묻히고 안 묻히고, 고거이 뭣이 중하대?” 정말 무덤이 필요 없냐고 묻는 딸에게 아버지는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93쪽)이라며 꼬실라버리라고 말한다. 이런 철학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라는 십팔 번을 달고 살며 사람들에게 돌려받지 못할 은혜를 베푼다. 먼지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94쪽) 유물론자 아버지의 삶은 장례식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화에서  면모를 드러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252쪽)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라는 금기어 속에 갇혀 해방 이후 박제된 삶을 살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문장에 아버지의 삶이 담겨 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4년뿐이었지만” 그의 삶을 평생 지배하며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252쪽)었던 시간은 시대의 온기를 입고 이제야 되살아난다. 아버지로 인해 가족과 사회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감내하며 살아온 딸은 장례식에서 만난 주변 인물들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한다. 아버지와 평생 반목해 온 작은 아버지, 아버지가 구례에서 사귀어 온 친구들, ‘나’와 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일화를 통해 현대사의 굴곡진 삶 이면의 보통 사람들을 만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겹게 넘어왔을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시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비로소 박제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빛을 본다. 우리는 ‘아버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고 이해하도록 이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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