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날 버린 회사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한 나를 버렸다고? 그렇다면, 나의 노하우를 무료로 풀겠어.’라는 마음이었는데, 나중엔 구독자 수가 하나둘 쌓여 나가는 걸 보는 게 참 좋았다. 적금에 복리 이자 붙는 거 보는 것처럼 마냥 흐뭇했다. 30분 만에 뭐 그렇게 많이 구독자가 쌓였을까 싶지만, 그래도 30분마다 들어가서 그 수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내 영상에 큰 도움 받았다는 댓글을 볼 땐 사명감까지 생겼다. 내가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더 잘하고 싶어졌다.
나는 홀수 달마다 국어 자격증 시험을 보고 있다. 그 시험을 직접 본 후,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시험 경향을 파악해서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있다. 장비랄 것도 없다. 컴퓨터에 내장된 카메라로 내 얼굴을 찍고, 컴퓨터에 자료 띄워 놓고 화면 녹화한 후, 겨우 컷편집만 해서 올린 영상들이 꽤 쌓였다. 구독자 수도 꽤 많아져서, 3월 말이 되면 첫 정산금도 받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시험 보러 갈 땐 조그맣게 포장된 멘토스를 지퍼백에 한주먹 담는다. 혹시라도 시험장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다소곳이 주먹을 부딪히는 인사를 한 후, 주먹 안에 든 멘토스를 건네야지 생각했던 거였다. 하지만 번번이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했다. 멘토스는 들고 간 것 그대로 들고 집에 왔다. ‘누가 날 알아본다고.. 김칫국 마셨네’ 스스로 현타가 와서 약간 부끄러워진 마음으로 말이다.
이렇게 조금은 멋쩍지만 신나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 준, 아주 멋진 일을 지금 하고 있지만,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육성으로 씩씩거리며 자판을 두드릴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선생님, ○○의 뜻이 뭔가요?’와 같이 사전만 찾아봐도 금세 알 수 있는 것을 묻는 경우다. 또 어떤 경우는 질문 게시판에 똑같은 질문이 계속 달려서, 난 하루에도 똑같은 답변을 몇 번이고 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왜 스스로 찾아보거나 공부하지 않는 거야?’ 하며 화가 났던 건데….. 불현듯 이런 시건방이 또 어딨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딱 그 정도의 나를, 내 필요를 증명해 준 사람들에게 비싸게 굴다니. 헐값인 주제에.
어렸을 때 난 질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엄마한테 쫑알쫑알 떠들어대기를 좋아했고, 이것저것 모르는 것들을 질문했었다. 그러면 엄마는.. 어땠더라? 대답을 잘 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대답은 안 중요하고, 질문하는 그 시간이 좋았나 보다. 뭐 가끔 정성스레 대답해 주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옆에서 대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즐겁고, 안심되는 일이었다. 난 그랬는데, 그들도 그런 건데… 대답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건데… 새로운 유형 앞에서 막막해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 역할을 해 줄 생각은 왜 못했을까. 날 믿으니까, 물어봐 준 걸 텐데, 난 짜증이나 내고… 컴퓨터 너머의 사람들이 내 짜증을 안 들어서 다행이다. 컴퓨터 너머로 음성이 즉시 전달되는 기술은 언제고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갑자기 어디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언제부터 ‘전문가’였다고. 언제 제대로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보기라도 했나. 이제 겨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인데 말이다.
밀려드는 자기 객관화에 조금씩 숙연해졌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화 내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고 답변을 해 주리라 다짐했다. 똑같은 거 또 물어봐도, 내가 강의에서 분명히 말했는데 또 물어봐도, 사전에서 금세 찾을 수 있는 거 물어봐도 그냥 다 대답해 줄 거다. 그들에게, 그들의 질문에 ‘지면서’ 이 가르치는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 우리말 ‘지며리’는 ‘차분하고 꾸준한 모양.’을 뜻한다. 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지며’ ‘지며리’, 그러니까 차분하고 꾸준하게 나아가 보겠다. 대충 가르치려는 마음에는 지지 않고, 오로지 날 귀찮게 하는 사람들의 질문에만, 날 필요로 하는 손길에만, 그리고 눈빛에만 화끈히 져야지. 지려고 하니 갑자기 다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기하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