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늘 피곤했어?
나: 여보, 여자들 화장하는 것 중에 ‘아이라인’ 알아?
그: 알지~
나: 진짜 알아? 뭔데?
그: 여보 눈 옆에 쑉 하는 거잖아.
뭉툭한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쓸어올리며 그가 말한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다 안다는 듯이 눈 옆으로 라인을 살짝 빼는 동작의 그 뭉툭한 손이 얄밉다.
나: 어, 아네. 아무튼 난 그 아이라인을 완전 얇게 그려야 된대. 나 같은 눈은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리면 눈이 답답해 보인다나. 그래서 오늘 눈을 까뒤집은 다음에 속눈썹 아래 점막을 아이라인으로 촘촘히 채웠어. 그래서….
그: (깜짝 놀라며) 에?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눈에 안 좋을 것 같은데…
나: 어어, 아무튼 그렇게 화장을 했더니 눈이 피곤하더라고. 오늘 피곤했다는 얘기를 하려고 한 거야.
그: 아니, 속눈썹 아래에, 그렇게 눈 가까이에 그리면 눈에 안 좋을 텐데..
늘 이런 식이다. 난 말의 서두가 길고, 그는 이상한 것에 꽂혀서는 말꼬리를 잡아 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피곤하다’이고, 나는 그걸 말하기 전까지 온갖 것을 가져다가 이것저것 다 늘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아닌 건 아닌 거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이해 안 되는 것은 이해될 때까지, 문제라 생각되는 것은 그 문제의식이 잠잠해져 사그라질 때까지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 가끔은 그런 그가 답답해서 ‘아, 가만히 있어 봐. 이제 중심 내용이 나올 거야. 형광펜 칠 준비해. 기다려 봐’라고 말하며 그의 입을 억지로 다물게 해야 할 때도 있었다. 도어락 잠금하듯이 ‘띠로리’ 소리 내면서 그 입을 다무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그는 한참 조용히 있다가 나중에 가서 다시 또 ‘근데 아까 그거…’ 이러면서 아까는 해결되지 않았던 그 의심을 거두려 노력한다.
서로 참 안 맞는 것 같지만 결국 둘의 이런 모습은 수다쟁이 루트로 향해 간다. 난 서두가 길어 말이 많아지고, 그는 말꼬리를 잡느라 말이 많아진다. 수다가 많은 사람에게 ‘수다스럽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같은 뜻의 우리말 ‘수다히’가 있다. ‘수다히’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게.’라는 뜻이다. ‘수다히’는 ‘수다스럽게’와 같은 뜻인데, 생소해서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었다. 잘 안 써서 깊게 가라앉은 말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 기분이 꽤 괜찮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서두를 길게 늘이면서 일부러 이것저것 단어를 넣었던 것도 같다. 그가 의문점을 갖게 되는 것이 하나라도 생기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나가 그의 의문 레이더에 잡히면, 그게 또 재미있으니까, 그 재미를 기다리고, 기대한다.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쌍으로 본격 수다쟁이의 삶을 살게 되었다. 별 영양가 없는 말일지라도 ‘수다히’ 서로를 대하며 ‘히히’ 웃는 삶에 익숙해졌다. (’수다히’를 ‘히히’로 연결 짓는 패턴은 이제 누구나 예측했을 것 같다. ㅋㅋ)
안타깝게도 요즘은 같이 누워 수다히 잠들지 못한다. 기가 막히게 밤부터 솟아나는 내 집중력 이슈로, 난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 그의 하품 소리가 여러 번 들리면, 나는 누워 있는 그에게 가서 ‘잘 자’ 인사하면서 (그냥 나가면 되는데, 꼭 안 나가고) 귀를 잡아당기고, 종아리를 주물럭주물럭 하면서 낄낄대다가 방을 나온다. 그러면 그는,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다섯 글자쯤 타이핑을 하는 사이에 잠든다. 코 고는 소리가 온 집을 울린다.
이렇게나 피곤해서 잠들기 직전인 아이를 내가 그렇게 괴롭힌 거구나 싶어서 다음날 심심한 사과를 하면, 10% 남았던 에너지를 다 쓰게 해 줘서 잠들 수 있었단다. 대답을 아주 잘 배웠군. 아무튼 난 고요한 새벽, 그의 코 고는 소리에 맞춰 또 무언의 수다를 떠는 기분이 든다. 코 고는 소리가 이랬다 저랬다 낼 말해줘야지 계획하며, 미리 연습해 보는 시간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나에게 말꼬리 잡는 애는 천생연분일지도. 말꼬리 잡고 잘 붙어 있어라, 수다히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