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드라마를 참 좋아한다. 외출 준비를 할 땐 OST가 좋은 드라마를 틀어 놓고, 복사하기 붙여넣기 정도의 단순 업무를 할 땐 대사가 재미있는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틀어 놓는다. ‘태양의 후예’는 시종일관 플레이되어 있어서, 같이 사는 사람은 “당신이 그야말로 태양의 후예다”라고 조롱을 했었다. 준비는 다 했는데, 외출하기까지 딱 30분 정도가 남아 있을 땐 집중해서 새로 보기 시작한 드라마를 튼다. 내게 주어진 달콤한 30분의 자유시간을 드라마로 채운다.
내 일상은 이렇다. 컴퓨터나 모니터에서 작게 띠- 하고 들리는 기계음만으로 공간을 채우고 싶지 않을 때, 음악 대신 드라마를 틀어 두는 것으로 일상이 이루어진다. 요즘 OTT는 한 회 끝나면 지들이 알아서 다음 회로 넘어가는 바람에, 앉은 자리에서 드라마 몇 회를 해치우게 되다 보니, 긴 시간 여유가 생겼을 땐 드라마를 잘 틀지 않고, 뭘 하는 중이나 뭘 하기까지 30분 이하의 시간이 남았을 때만 드라마를 튼다.
그래서 드라마를 대부분 쪼개어 보게 된다. 짧게는 2번, 길게는 4번까지도 쪼개어 보니, 가끔 내가 이 드라마를 봤었나 안 봤었나 헷갈린다. 매번 새로운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똑같은 걸 서른 번 넘게 보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감동을 느낄 새가 있을까 싶겠지만, 드라마에 심하게 몰입하는 나로서는 쪼개 보는 상황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몰입이 어느 정도냐 하면, <더글로리>를 볼 땐 ‘존나’를 입에 달고 살았고, <멜로무비>를 볼 땐, 똥강아지 같은 최우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봤었고(바라보려 노력했었고), <폭싹 속았수다>를 볼 땐, 가슴에 손을 모으고 ‘너무 좋아’를 외쳐댔었다. 심지어 내레이션이 있는 드라마들에 취해 있을 땐, 내 생활에도 은근한 내레이션을 깔았다. ‘난 드라마를 참 좋아한다’와 같은 내레이션을. 그 내레이션은 이 글의 첫머리가 되었다.
우리말 ‘드나나나’는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늘’이라는 뜻이다. 드라마에 들어가거나 드라마에서 현실로 나오나, 나는 늘 내 인생이 드라마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인생은 16부작보다 더 긴 드라마다 보니, 흔히 알고 있는 드라마의 패턴대로 흘러가지 않는 때도 많았다.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결혼식 축사만큼은 아빠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여느 드라마처럼 아빠는 딸의 결혼식에 마음을 듬뿍 담은 축사를 쓰고, 그 축사를 들은 딸은 마음의 앙금을 다 떨쳐낸다, 뭐 그런 시나리오를 생각한 것이었는데… NG.. 그래 그건 NG였다.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식 주례 대신 양가 아버지들의 축사를 듣는 시간, 아빠를 향해 서있던 신랑과 신부가 무색하게, 아빠는 갑자기 저벅저벅 걸어 우리를 벗어나 하객들 앞에 서더니, “여기 와 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저는 6개월 사이에 딸 둘을 모두 결혼시켜 연타석 홈런을 친 기분입니다….” 이런 내용의 축사를 하셨다. 아빠는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잘 가다듬고, 하나도 떨지 않고 긴 축사를 술술, 대본도 보지 않고 해냈다. 그때 내 표정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느꼈을 것이다. ‘신부 표정이 왜 저러지? 아빠랑 별로 안 친한가?’ 했을 게 분명하다.
맞다. 내 표정은, 대본을 무시하고 과한 애드립으로 극의 전개를 망쳐놓은 배우를 바라보는 감독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아빠의 따뜻한 말을 기대했던 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이 컸고, “아빠는 내가 내민, 화해의 악수를 거부했어”라고 엄마한테 말했었다. 나중에서야 듣게 되었는데, 아빠와 내 싸움은, 대부분 아빠의 취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빠의 기억 속에는 나와 싸웠던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랑 선희랑 사이가 왜 안 좋아?’라고 했단다. 아빠는 하나도 앙금이 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빠라도 앙금 없이 돌아가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빠가 안 좋은 마음 가지고 가셨다면, 그것 또한 NG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큰 NG를 남기고 하늘나라에 가신 아빠는 그게 NG였다는 걸 알까? 지금 이 글을 보고 전후 사정을 알게 되어 조금 민망해 하실까? 때로는 NG장면이 더 재미있는 법이니, 이제 아빠처럼 내 맘도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늘 예측되는 드라마나, 늘 극적이고 싶은 나나, 드나나나, 늘 해피엔딩이길 바란다. 어떤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별로여도, 어느 한 장면이 좋아 계속 보게 되던데, 내 인생도 좋은 장면 하나 건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삶일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