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자고 일어나야겠다.’
거의 집에서 일하는 나는 낮잠을 자유롭게 잘 수 있다. 일을 하다가 하품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눈이 감길 정도로 너무 피곤하면 30~40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난다. 내가, 직장생활은 절대 못했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 피곤해서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시간에도 직장에서는 자리를 지켜야 하니 말이다. 낮 시간을 꼬박 직장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면, 참으로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고, 나만의 데드라인도 있는지라 마냥 늘어질 수는 없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추려는데, 세상에나, 3시, 3시 30분, 4시, 5시, 5시 30분 … 예전에 맞춰 놓았던 알람들이 빼곡하다. 내 오후 시간은 낮잠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난 왜 오후만 되면 이렇게나 에너지가 달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까. 이 낮잠 시간들과 낮잠을 잘까 고민하는 시간들과 낮잠에서 깨어나는 시간들까지를 모두 깨어있는 시간으로 바꾼다면 엄청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낮잠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밤잠을 깊게 자지 못한다. 우선 함께 사는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밤잠을 설치게 하는 데 큰 이유가 된다. “나 어제 코 많이 골았어?”라고 그가 말하면, 나는 “응, 막 분노하던데? 막 윽박지르더라고”라고 말한다. 그러면 또 너무나 미안해 하는 통에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다. 또, 밤에 드는 생각이라는 게 지렁이처럼 길쭉해서 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 지렁이가 밟으면 꿈틀 하는 것처럼 내 생각들도 어느 하나 그냥 스무스하게 지나가는 법이 없다. 지나가던 생각을 툭 밟으면 그것에 파생된 생각들이 이것저것 튀어 나온다. 어떤 날은 돌아가신 아빠 생각, 또 어떤 날은 왕년에 잘 나가는 줄 알았던 시절의 철 없던 행동들까지. 이불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밤 시간을 보내다 보면 수면의 질은 현저히 떨어진다.
꿈도 휘황찬란하게 꿔서 자도 자도 피곤하다. ‘아 잘 잤다’ 하고 깨어나 본 적이 별로 없다. 언제쯤 나는 푹 자고 맑은 머리로 깨어날 수 있을까. 푹 자는 잠을 우리말로는 ‘꽃잠’이라고 한다. 우아, 정말 탐날 정도로 예쁜 단어다. 푹 자고 일어난 날은 컨디션도 좋아서 하는 일도 잘되어 제 실력을 꽃 피울 수 있고, 푹 자고 일어나면 짜증도 잘 안 나서, 꽃 같은 성정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꽃을 받을 때, 꽃을 고르는 마음까지 받는 듯하여 더욱 감격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깊은 잠을 걱정하는 말은 내가 잘 잤으면 하는 마음까지 받는 것 같아 더욱 감격하게 된다. 꽃을 주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꽃잠을 기원하는 마음은 참 예쁘다. 꽃잠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밤사이 그 꽃이 싱그럽게 피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을 듬뿍 주는 마음은 참 예쁘다.
오늘 밤에도 내 잠은, 겉으로 보기엔 ‘잠잠’해 보여도 그 안에는 복잡다단한 일들이 펼쳐질 것이다. 결국은 걱정에 걱정에 걱정이 이어지는 복잡함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해야 더 잘될 수 있을까, 이런 욕심이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내 잠이 꽃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더 깊이 고민해 보았다. 어떤 꽃잠이 좋을까? 꽃말을 검색해 본 후 내린 나의 소망, 내 잠은 ‘보리수 꽃잠’이었으면 좋겠다. ‘보리수’의 꽃말은 ‘해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