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선희 Nov 06. 2024

바스락장난 하기 좋은 날

오랜만에 포근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할 수 있는 시기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오랜만에 긴 팔 맨투맨에 반바지를 입고, 양말에 크록스를 신었다. 맨발로 나가면 발이 시려울까 싶어 양말을 신었는데, 또 약간 더울까 싶어 구멍 뚫린 크록스를 신어 주었던 것이다. 딱 적당한 중간값을 찾아나가는 외출준비였다.


이마에 닿는 햇볕이 따뜻했고, 크록스 구멍 사이로 드는 바람이 양말을 보송보송 말려주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온감각이 살아나는 순간 나는 들었다.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를. 함께 걷던 사람에게 “이게 바로 사운드 오브 폴, 가을의 소리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다가 눈앞에 유독 햇볕에 바짝 말라 꼬부라진 낙엽을 발견했다. “오, 저거 소리 많이 나겠다, 밟아 봐.” 하고 함께 걷던 사람에게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을을 잠시 양보했다.


그 낙엽은 정말 크게 바스락거렸다. 과자를 입에 가득 넣고 씹을 때 나는 바사삭 소리 같기도 했다. 바사삭거리는 과자가 먹고 싶어졌다. 또 걷다가 이번엔 그늘에 있는 낙엽이 보였다. 이 아이는 또 어떤 소리가 날까 싶어 살짝 밟아보았다. 아까 과자 소리를 내던 낙엽과는 달리 물기를 약간 머금은 소리, ‘바스락’까진 아니고 ‘스락’ 정도의 소리가 났다. 같은 낙엽인데, 색깔도 다르더니, 소리도 이렇게 다르네 생각하며 산책을 마치고 과자를 사러 갔다. 오늘의 과자는 ‘꼬깔콘’이었다.


우리말에는 ‘바스락장난’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바스락거리는 정도의 좀스러운 장난’을 뜻한다. 내가 산책길에 했던 게 바로 바스락장난이었다. 뭘 이런 좀스러운 장난까지 이름을 붙여 사전에 올려놓았을까 싶다. 이름을 붙여야 좀스러운 장난을 지적할 수 있어서일까? 가능성은 있지만, 아니었으면 한다. 이름을 붙여야 그걸 제대로 즐길 수 있으니, 그래서 이름을 붙인 것이길 바란다.


어릴 적 물건을 쌀 때 썼던 뽁뽁이를 한 칸 한 칸 터뜨릴 때의 바스락거림, 야무진 손으로 종이학을 접었을 때의 바스락거림 들이 생각난다. 머리를 비우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던 시간, 그래서 기분이 들뜨지 않아 좋았던 시간이 바로 바스락장난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가을에 낙엽을 밟으면서 마음껏 즐겼던 ‘바스락(樂)’은 가을에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붉게 물드는 가을의 시간, 바라보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이제는 청각의 즐거움을 찾아나가 보는 건 어떨까? 그늘을 지나 햇빛과 햇볕이 만든 공간을 지날 땐, 바닥에 놓인 낙엽들을 가만히 밟아 보자. 그러면 그것들이 내 바스락장난을 받아주며 말할 것이다. ”안녕 나는 가을이야“

작가의 이전글 언제쯤 꽃잠에 빠질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