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베트남 닌호아 백마부대>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장춘동의 그림자는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다가—마침내 유령처럼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박규는 풀숲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총을 든 팔은 감각이 사라졌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은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그 놈을 겨눴을 때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이제 더는 뛸 이유를 잃어버린 듯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눈앞의 원수를 두고도 당겨지지 않던 방아쇠.
이 모든 상황이, 마치 무지개 여신이 짜 놓은 비극의 각본 같았다.
끝끝내 자기를 가지고 놀다, 이 순간마저 조롱하는 것 같아서—
규의 입 안엔 쓰디쓴 분노가 고였고, 꽉 깨문 입술에서 난 피비린내가 혀 끝에 스며들었다.
규는 끝도 없는 절망을 곱씹으며 풀숲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축축한 풀잎이 얼굴을 스치고, 군복 속으로 스며든 이슬은 식은 땀과 섞여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반대편 초병들에게 들키거나 말거나, 규는 흙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초소에 도착했을 때 김 일병은 여전히 낮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규는 초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탄창을 빼고, 방아쇠를 당겨봤다.
딸깍―
방아쇠가 가볍게 당겨졌다.
딸깍, 딸깍―
‘젠장! 이럴 줄 알았다.’
그 순간, 어떤 차가운 깨달음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규는 허공을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놈을 죽이면 안 되는 건가? 정말, 과거를 바꿀 수 없는 거야···?”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해야 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뒤엉켜 어지럽게 요동치던 그때, 밖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어둠을 두드렸다.
규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김 일병의 철모를 툭 치며 밖을 향해 외쳤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무궁화!”
그러자, 비몽사몽 눈만 겨우 뜬 김 일병이 허겁지겁 소리쳤다.
“쏘지 마쇼잉! 삼천리요, 삼천리~”
* * *
다음 날 아침.
장춘동은 숙취로 퀭한 눈을 하고 부대 안쪽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나타났다.
소각장 근처, 그 건물 지하에는 ‘고문실(Phòng tra tấn)’이라 적힌 붉은 철판이 한쪽이 기울어진 채, 녹슨 나사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장춘동은 흐느적거리며 유행가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그리고—
끼이익~.
지옥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고문실 안, 입구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최 상병이 담배연기를 삼키다 만 채 화들짝 몸을 일으켜 거수경례를 붙였다.
장춘동은 본체만체 철문을 밀고 들어가, 안으로 스며든 냉기 속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고문실 구석 피묻은 철제의자에 묶여 있던 포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고문실의 천장은 낮았고, 전구는 노란빛을 깜빡이며 숨을 헐떡였다.
장춘동의 시선이 방 안을 찬찬히 훑었다.
고문실 한쪽 벽엔, 피 묻은 가죽채찍과 벗겨진 전기선이 아무렇게나 매달려 있었다.
바닥엔 쇠파이프와 부러진 몽둥이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위엔 피인지 물인지 모를 얼룩이 검붉게 번져 있었다.
깨진 세면대에선 또르르, 또르르 물방울이 떨어졌다.
장춘동이 일부러 틀어둔 것이었다.
소리가 공포가 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포로는 그 소리에 밤새 온몸을 떨어야 했다.
포로는 어려 보였다. 팔은 등 뒤로 묶였고, 팬티 한 장만 남기고 전신이 발가벗겨져 있었다.
온몸은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고, 피부 곳곳엔 말라붙은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포로의 입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무언가 지켜야 할 ‘신념’이 그 안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노련한 장춘동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 이미 서서히 무너져가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그는 천천히, 쇠로 된 전기봉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일부러—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갔다.
끼익~ 끄아악··· 비명처럼 갈려 나오는 쇳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문이 시작되자 고요한 방 안엔 치익—칙, 치익— 살가죽이 타는 소리와 코를 찌르는 끔찍한 냄새만 가득 찼다.
3일 전 정글에서 붙잡혀 이곳으로 끌려온 포로는 처음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손톱이 뽑힐 때도, 고춧가루물이 폐로 밀려들 때도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만 흘렸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장춘동의 고문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다.
그에게 고문은 요리이자 놀이였고, 일상이었다.
어린 포로에게 그의 잔혹함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극한을 넘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있었다.
몇 시간 뒤. 젖은 시멘트 바닥 위로 절망으로 가득 찬 한 마디가 뚝 떨어졌다.
“끼엠... 뒤편... 밀림... 동쪽...”
장춘동은 말없이 피 묻은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입꼬리엔, 희미하고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