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하이난거리/백마부대>
하이난 거리.
닌호아에 주둔 중인 한국군 백마부대와 미군 후방 보급기지 사이에 있던 ‘월남의 홍등지옥’이라고 불리던 곳.
미군과 한국군을 상대로 돈을 좇아 날아든 불나방들이 낮에는 웃음을 팔고 밤에는 술과 몸을 팔던 곳.
한국군 병사들은 이 곳을 ‘웃음을 파는 부비트랩’이라고 불렀다.
낮에는 환한 미소와 음악이 넘실댔지만, 밤이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불행이 낡은 나무문 뒤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이난거리 깊숙한 골목 끝.
폐가처럼 보이는 집 처마에 빨간 입술 모양을 닮은 간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SON MÔI ĐỎ’ — 립스틱 클럽.
클럽 앞 도로는 술 냄새, 향수 냄새, 담배 냄새가 뒤섞여 매연처럼 매캐했다.
하지만 클럽 안은 그보다 더 짙은 담배연기와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황갈색 벽지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펴서 떨어져 나갔고, 천장에 달린 선풍기는 느릿느릿 삐걱대며 돌고 있었다.
평일이어선지 클럽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구석진 바 스툴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한 여자.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긴 흑발, 진한 화장으로 나이와 표정을 감춘 여자.
클럽의 종업원들 중 누구보다 웃음이 매력적인, 하지만 누구보다 웃음이 슬픈 린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희뿌연 담배 연기 너머 바람에 삐걱대는 문을 보며 기도했다.
‘제발··· 오늘은 오지 마!’
하지만 신은 한 번도 그녀의 기도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문이 열렸고, 악마가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하이~ 린!”
반쯤 풀어헤친 군복 상의, 삐딱하게 쓴 모자.
가슴팍 이름은 ‘장춘동’이었다.
* * *
오늘밤 장춘동을 쏘기로 결심한 순간.
규의 가슴 속 작은 불씨는, 순식간에 온몸을 집어삼키는 화염으로 번졌다.
그것이 살인에 대한 두려움인지, 복수를 떠올릴 때 솟구친 광기 때문인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규의 무거운 기운에 입을 봉인당한 김 일병은 어느 순간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규의 머릿속에 김 일병은 한 번 잠들면 처녀귀신이 업어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부대 전체 소등까지는 30분쯤 남았다.
기억을 더듬었다. 장춘동은 늘 그 전에 돌아왔었다.
막사에 돌아와서 깽판을 치던 그 밤―그 밤이 떠올랐다.
그래! 바로 오늘밤이다.
총을 쥔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그리고 문득 어떤 생각이 규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장춘동을 죽이고―나는 살아남자!”
규는 소총을 들고 조심스레 초소 밖으로 기어 나왔다.
초소 안에서 쏘기엔, 위치가 너무 노출돼 있었다.
흙길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총소리도 바로 퍼질 터였다.
‘이 거리에서 총을 쏘면, 틀림없이 들킨다’
장춘동이 하이난 거리를 벗어나 군부대 영내에 들어설 즈음. 규는 초소와 초소 사이―가장 어둡고, 풀숲이 우거진 그 지점을 떠올렸다.
거기가 딱 좋았다.
어둠이 깊고, 시야가 닿지 않으며, 뒤가 미군 초소라 총소리가 퍼져도 곧장 귀에 들어오지 않을 곳.
“여기라면··· 끝낼 수 있다.”
규는 흙길 옆 풀숲에 바짝 엎드려 목표지점을 향해 기어갔다. 이슬에 젖은 흙이 군복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마에서 뚝뚝 떨어진 땀이 흙냄새 위로 번졌다.
규는 목표지점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엎드려 쏴 자세로 숨을 골랐다.
10분쯤 지났을까.
하이난 거리 끝, 흔들리는 붉은 조명을 등지고—술에 취한 실루엣 하나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장춘동이었다.
100미터··· 70미터··· 50미터··· 30미터···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불빛을 등지고 있어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실룩거리는 입꼬리, 평소 이글거리던 눈빛은 술에 젖어 흐려져 있었다. 그 놈이 클럽에서 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놈의 심장이 규의 소총 조준경 안에 가득 찼다.
그 놈은 풀숲에 숨은 규를, 자신의 심장을 겨눈 총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나는 살인자가 되어야 한다.”
규는 깊게 들이쉰 숨을 멈추고, 방아쇠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딸깍~ 탕! '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망설였나? 아냐! 그럴 리 없어!’
규는 검지에 힘을 줘서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막사에서 나서기 전엔 딸깍~ 딸깍 잘만 당겨졌던 그것이!
마치 누군가, 아니 무엇인가 방아쇠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규는 깨달았다.
‘이 총은 내 손에 있지만, 운명은─내 손에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