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백마부대>
초소는 오래된 철제 의자의 관절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대며 울었다.
벽면엔 휘갈겨 쓴 낙서들이 빼곡하고, 압살당한 모기들이 검붉게 눌어붙어 있었다.
이 곳은 부대 동남쪽, 하이난 거리와 맞닿은 외곽 경계선. 저 멀리, 하이난 거리의 붉은 네온들이 환영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초소 경계근무는 2인 1조, 하루 4교대로 이루어졌다.
규와 김 일병이 자리를 지킨 지도 어느덧 세 시간이 흘렀다. 규는 소총을 옆에 세워 두고, 등을 벽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낮은 목소리로 조잘대던 김 일병도 조용했다. 평소와는 다른 규의 기운에,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 듯했다.
규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들과 함께 덤프트럭에 치인 그 순간, 그는 무지개를 저주했고―그 저주 끝에서, 53년 전 전쟁터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규는 이것이 곧 깨어날 악몽인지, 신을 저주한 대가로 받은 형벌인지, 그것도 아니면 신이 준 마지막 기회인지―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그렇게 한참 동안 웅크려 있었다.
그때였다.
초소 밖,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 교대시간이 아닌데···.'
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등을 벽에 붙이고 소총을 들었다. 총구 끝이 떨렸다.
김 일병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무궁화!!!”
"흐흐흐~"
어둠 속에서 흐물거리는 웃음소리가 뱀처럼 기어 나왔다.
“무궁화! 무궁화!!”
김 일병이 다시 소리친 그 순간―
초소 바로 앞 5미터 지점에서 거칠고 익숙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새끼가! 나야 나! 내가 누군지 몰라? 죽고 싶어?”
그 목소리에 규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김 일병은 당황해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장 하사님이죠? 그래도··· 암구호는 좀···”
“암구호는 개뿔~ 나 모르면 니가 베트콩이야, 새꺄!”
장춘동은 뭐가 급한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하이난 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장 하사, 저 썩을 놈 또 나갔소잉. 보나마나 린 괴롭히러 가는 것이겄지라?”
김 일병이 침을 퉤~ 뱉으며 욕지기를 쏟아냈다.
김 일병은 전우들 앞에선 늘 호남 사투리를 썼다. 하지만 장춘동 앞에선 단 한 번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장춘동이 중대장 장기동 중위와 같은 전남 고흥 출신이란 걸 부대원 모두 알았지만, 그는 고향을 부정했고 고향 사람을 혐오했다. 그는 호남 출신이라면 상관도 대놓고 무시했고, 하급자는 원수라도 만난 듯 악랄하게 괴롭혔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김 일병은 장춘동 앞에만 서면 입에 자물쇠를 채우듯 사투리를 거둬들였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이난 거리 붉은 조명 속을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실루엣―장춘동이었다.
이런 밤이··· 있었던가?
53년 전 이 시각, 이 위치.
어렴풋한 잔상은 있었으나,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아니라면··· 이 순간은 누가 만든 것인가?
멀어져 가는 장춘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규의 머릿속에 섬뜩한 생각 하나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돌아오는 그놈을··· 그냥 쏴 버릴까?’
지금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끝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놈이 죽는다면 끼엠 마을의 피바람도, 광주의 학살도, 그리고—뚜엣의 죽음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발의 총알로··· 역사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규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센 전율이 휘몰아쳤다.
그래! 이건 저주가 아니다.
53년 전 악몽이 되살아난 이유.
그건 신의 형벌이 아니라—무지개 여신이 규에게 내려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규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장춘동이 어서 돌아오기를···.
시간이 미친 듯이 흘러,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