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베트남 닌호아 백마부대>
박규는 방금 전까지 옆에서 치를 떨던 함 상병이, 잘린 귀가 담긴 씨레이션 통을 품에 안고 상황실 천막 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함 상병은 작전장교에게 씨레이션 통의 귀들이 장 하사의 전공이라고 보고할 테고, 장교는 의심을 품으면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전공장부에 그 이름을 올려줄 것이다.
입대 일자가 더 빠른 규보다 먼저 하사로 진급한 장춘동.
그가 분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전쟁터의 썩은 커넥션과 자신의 야비한 본능을 누구보다 잘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김 병장이 한쪽 다리를 쩔뚝이는 규를 데리고 경비중대 막사로 갔다. 그는 규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걷어찬 게 미안했는지 “한숨 자라”면서 등을 밀었다.
규는 막사 침상에 앉아 군화끈을 풀었다.
침상은 눅눅했고, 천장은 낮고 어두웠으며, 공기는 오래 묵은 먼지 냄새로 퀴퀴했다.
75년을 살다 22세로 회귀한 몸뚱이 속 찌뿌둥한 감각들이 삐거덕댔다. 그제야 53년 전 과거로 떨어지면서 겪고 있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김 병장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규는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규는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김정수 일병이었다. 작은 키에 통통한 볼살, 동그란 눈에는 늘 장난기가 장전돼 있었다.
“박 병장님, 싸게싸게 일어나시지라~ 지랑 경계근무 나가야 헌당께요.”
규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막사 밖에선 실전인지 훈련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총성이 들려왔다.
김 일병이 규의 옆에 놓인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함 상병님이 챙겨 주셨어라. 박 병장님 쫄쫄 굶었다고···. 햄버거 하나랑, 콜라 하나 넣어주셨당께요.”
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에 탄띠를 둘렀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을 터였다. 둘은 말없이 막사 밖으로 나왔다. 뚜엣이 살고 있는 끼엠마을 앞 초소가 아닌 반대편―하이난 거리 쪽 경계초소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사를 벗어나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마치 피가 퍼진 물처럼 숨결이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누런 전등빛이 흘러나오는 막사들 사이를 지나, 자갈 깔린 찻길과 잔디가 듬성듬성한 연병장을 가로질렀다.
낮엔 뜨겁던 흙길이 어느새 축축하게 식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길 위로, 나무들의 긴 그림자가 어둠과 뒤섞여 흔들렸다.
떠벌이 김 일병은 초소까지 걷는 내내 쉬지 않고 떠들었다. 여동생 정희 얘기, 그동안 모은 딸라 얘기, 갑자기 만두 얘기까지―줄줄이 쏘세지였다.
“정희 고것이 쪼까 허약하당께요. 군대 오기 전에 빚이라도 내서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먹일 걸 그랬당께요~ 주변에 살뜰허게 챙겨줄 친척도 읎는디··· 아따! 고것이 낮엔 공장 댕기고, 밤엔 야학인가 뭔가 댕김스롱 공부까지 헌다고 안 허요? 쬐끄만 것이 대견해 죽겄어라~”
그가 전투복 앞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규에게 건넸다.
가로등 불빛에 살짝 비친 사진 속엔 순박한 얼굴의 여자가 쑥쓰러운 듯 수줍게 웃고 있었다.
“정희 고것이 연애라도 혔음 좋겄는디···. 박 병장님 같은 분 만나믄 참말로 좋겄구만~ 아따, 나가 또 헛소릴 해뿌렀네요잉. 병장님은 대학도 댕기신 분이고, 정희 고것은 그냥 중졸 공순인디··· 어딜 감히~”
김 일병은 넋두리하듯, 마치 자기 귀에만 들리라는 듯 중얼거렸다. 규는 김 일병이 무안해할까 봐, 무심한 척 김 일병의 철모를 툭 쳤다. 그리고 사진을 조용히 돌려 줬다.
규의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저려 왔다.
뚜엣.
그 이름, 그 얼굴이 낯선 전장의 밤공기 속에서 또렷하게 떠올랐다. 초소에 가까워지자 김 일병의 수다가 뚝 끊겼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 켜졌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무궁화!”
김 일병이 총에 맞을세라 황급히 외쳤다.
“삼천리요! 삼천리! 아따~ 삼천리 금수강산이랑께요.”
그 방정맞은 대답에 규도 초병들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