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분노에 떠는 쿠그리

<2025년 4월 5일 밤 · 대전병원 특실>

by 부지깽이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긴 침묵 후에 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이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 없었어.

그리고,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입술 사이로 두 마디를 힘겹게 토해냈다.

“… 엄마”

“… 장춘동”


병실 안엔 다시,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마쯤 흘렀을까.

탄의 눈물이 어느샌가 멎어 있었다.

거친 숨소리만 떠돌던 병실에서 정희의 손 떨림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력이 힘겹게 수첩을 다시 넘겼다.

―두 번째 비번날.

뚜엣과 데이트를 마치고, 립스틱클럽으로 향했다.

몇 줄 뒤, 그날의 지옥이 기록돼 있었다.

―클럽 안은 박살이 나 있었고, 장춘동은 미친 개처럼 날뛰고 있었다. 린의 뺨을 때리고, 김정수 일병을 짓밟았다. 말리던 나도 쓰러졌다. …우릴 구해준 건, 리차드였다.

리차드!

탄, 양헌, 민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력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김정수 일병을 쏜 게, 정말 장춘동이었을까?

그 말이 허공에 남아 흔들릴 때—

정희가 짧은 숨을 토하며 자리에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엄마!”

윤이 정희를 재빠르게 안아 들었고, 력도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 숨 쉬어요!”

벌떡 일어나 달려온 민주가 급히 정희의 맥을 짚으며 말했다.


그제야 력은 수첩을 덮었다.

천천히,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 하나 없이.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아빠의 수첩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의 심장을 찢는 증언이었다.


정희가 소파에 옮겨진 뒤, 병실은 숨죽인 채 정지된 시간 속에 잠겼다.

모두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고, 윤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탄은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양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다 진짜였구나.”

력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이 계속 떨렸고, 수첩을 꼭 쥔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그는 수첩을 조심스레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가장 가까운 곳, 가장 조용한 곳에.


그 순간, 민주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 수첩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야.”

그녀는 손가락을 펴 가며 정리했다.

“문신 R.K. 덤프트럭, 광주, 리차드, 장춘동, 그리고 무지개… 우린 지금, 퍼즐 조각을 모으고 있는 거야.


양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준비했을 거야. 하지만… 우린 지금 시작했잖아.”

윤은 정희의 손을 감싸며 속삭였다.

“엄마가 가장 무서워하던 이름이 장춘동이었다니…. 아빠가 무지개만 봐도 밤새 뒤척이시던 이유를… 이제 이해하겠어.


민주가 조용히 윤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들었어. 우리 아빠도 술 취하면 울면서 내뱉던 그 이름.”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눈을 비비며 덧붙였다.

“우린… 같은 전쟁 속에서 살아온 셈이야. 가족은 아니어도.”

그 말에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지만, 하나의 무지개 아래, 같은 그림자 속에 묶여 있었다.

탄은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나가 별관 옆 흡연부스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다, 네온사인과 뒤섞여 무지개 같은 형체를 만들었다.


그걸 바라보며 탄이 낮게 내뱉었다

“엄마를 죽인 것도 너였다니…. 레인보우 키퍼? 네 놈들을 갈가리 찢어발겨 줄게. 기다려!”

그의 허리춤 안쪽, 가죽 칼집에 들어있는 쿠그리가 조용히, 그러나 분노를 못 이긴 듯 떨고 있었다.

이전 15화045. 전공조작 꼬리는 잡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