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하이난 거리>
며칠 후, 붉은 해가 지평선에 닿기 직전의 늦은 오후.
하이난 거리 외곽, 오래된 골목의 깊은 안쪽.
시간도, 발걸음도 잘 들르지 않는 그 음침한 골목에는 누군가 간판조차 달지 않은 허름한 펍이 숨어 있었다.
벽돌 틈마다 검게 번진 곰팡이, 부서진 창틀로는 기름기 밴 바람만이 스며들었다.
녹슨 철문 위엔 희미하게 지워진 영문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곳이 아직도 영업 중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기억 속 장소였다.
한때 리차드와 박규는 이곳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곤 했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누가 들을세라 낮은 목소리로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를 확인하던 구석 자리.
그곳엔 침묵이 벽을 타고 흘렀고, 눅눅한 공기만이 호흡을 멈춘 채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그 낡은 펍 앞에, 규가 서 있었다.
어깨에는 군용 점퍼가 걸쳐져 있었고, 그의 표정은 바람결조차 삼킬 듯한 고요를 머금고 있었다.
벽돌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담배 연기, 그 안에, 발자국 소리가 스며들었다.
리차드 한. 그의 걸음은 여느 때처럼 단정했고, 마치 정해진 약속이라도 된 듯, 규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규. 린은 안전해.”
리차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투는 침착했고, 그 속에는 안도의 기색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규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 어디로?”
“하이난 거리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이야. 영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찻집이지.”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예전에 우리 아버지와 인도차이나 정보망에서 함께 일했던 영국 정보장교가 있었어. 이름은 에드워드 밀스. 그 사람이 지금 그 찻집을 운영해. 부인 헬렌과 함께. 둘 다 오래 전부터 민간 외교관 신분으로 미군과 협력해 온 사람들이야. 그 집이라면, 린은 확실히 보호받을 수 있어. 더 이상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할 수 없어.”
규는 그 말을 듣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묵직한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 정말 고마워. 리차드.”
그 짧은 말에는 그동안의 걱정과 미안함,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리차드는 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린은 이제 한국군과 엮이지 않을 거야. 거긴 미군 전용 찻집이니까. 손님도, 그녀를 돌보는 사람도… 전부 다르지.”
그리고—리차드는 말을 멈추었다.
조용히 고개를 들고, 서쪽 하늘에 번진 붉은 노을빛을 바라보았다.
“린은…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해.”
규는 그 말을 깊이 새겼다. 사람이 웃는다는 게, 전쟁터에선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시 웃게 하는 일’이, 이 지옥 같은 곳에선 얼마나 절박한 싸움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