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미군부대>
회색빛 형광등이 복도의 허공을 가늘게 긁어내며 윙— 하고 울었다.
리차드는 그 아래를 묵묵히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한 울림이 복도 바닥을 깨우는 듯했다. 그는 발을 멈췄다.
조금 더 밝은 조명이 비추는 방, 문 앞에 붙은 철제 명패엔 ‘면회실’이라는 단어가 기계적으로 박혀 있었지만, 그 단어가 암시하듯 따뜻하거나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체온이 닿지 않은 공간이었다.
회색 벽지, 금속 프레임 침대, 깨진 타일 사이로 녹이 스민 세면대. 화장실은 플라스틱 커튼으로 겨우 가려져 있었고, 그마저도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 삭막함의 정중앙에—린이 앉아 있었다.
낡은 군용 담요를 무릎에 덮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따라 흐르고, 얼굴은 핏기를 잃고 창백하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은 건조하게 갈라져 푸르스름했으며, 눈가는 울다 지친 것처럼 부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거친 숨결도 흐느낌도 없이, 그저 묵묵히—견디는 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리차드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 소리에 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놀람도, 반가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텅 빈 표정. 감정을 밀폐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침묵의 얼굴.
“괜찮아요?”
리차드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손끝으로 감싸듯—그는 목소리의 높낮이를 줄이고, 숨결의 진폭까지 조심스레 조절했다.
진심을 들려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온도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린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말보다 더 깊게 속삭이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고….
‘울기도 전에 무너졌고, 무너진 뒤엔 울 수도 없었다’고….
리차드는 방 한쪽의 의자를 천천히 끌어와 린 앞에 앉았다.
허리를 펴고,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얹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린. 부탁이 있습니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곧,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네…”
“당신이 겪은 일들을, 가능한 한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의 말에는 의심도, 강요도 없었다.
그는 진실을 캐내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할 뿐.
그녀의 상처가 말로 흘러나올 수 있다면—그 말들을 흡수해 줄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이다.
린은 입을 열지 못한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방 안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고요히 오갔다.
그 침묵 속에서, 리차드는 처음으로 자신 안에서 어떤 기묘한 감정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불쑥 스쳐간 건 동정심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깊고 조용한 무언가가 자리를 잡았다.
연민.
마치 뿌리도 없이 시작된 감정이, 어느 틈엔가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린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 작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마치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였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숨결은 길고 고요했지만, 그 안엔 오래 참고 눌러온 것들이 미세하게 부서지며 섞여 있었다.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을 한번 문질렀다.
마치 입안의 말을 다듬듯, 떨리는 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한 의식처럼.
그리고 마침내—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린은 침묵을 깨듯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였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6개월 전이었어요. 그 사람이 마을에 왔어요. 그날 밤, 엄마를… 그리고 엄마는… 스스로…”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억지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엄마 장례식 날, 전… 클럽으로 끌려갔어요. 울음을 그치지도 못한 채, 바에 앉았죠. 그날부터… 매일 밤 왔어요. 술에 취한 척하지만 눈빛은 짐승 같았고, 문을 닫으려 하면 막고, 웃지 않는다고 뺨을 때리고…잔을 늦게 채우면 머리채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발로, 복부를 걷어찼어요. 그리고 그 다음엔… 말 못 할 짓을…”
그 대목에서 린의 목소리는 자주 끊겼다.
단어와 단어 사이엔 가느다란 숨소리가 스며 있었고, 애써 삼킨 울음이 그 사이를 메웠다.
그녀는 다시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을 잇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곤 했다.
말끝은 흐릿했고, 기억은 덩어리진 어둠처럼 뭉쳐 있었다.
그녀에게 그 날들은, 하나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고통이 덮쳐오던 나날이었다.
그 기억을 꺼내어 말로 풀어내는 건, 마치 심장을 짜내는 일처럼… 숨이 멎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리차드는 린의 얘기를 듣는 내내 단 한 번도 다그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때로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멈추면 기다렸고, 다시 말을 잇기 시작하면 귀 기울였으며, 그녀가 울면—그저 말없이 곁에 있었다
긴 얘기가 끝났을 때—린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숨조차 들이마시지 않는 듯, 그대로 얼어붙은 사람처럼….
리차드는 그 침묵을 천천히 깨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단정했으며, 말끝은 조심스러웠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의 말은 다정한 위로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조용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린은 작게 웃으려 했다.
입꼬리를 올려 보려 애썼다.
하지만 웃음보다 먼저, 눈물이 흘렀다.
투명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무릎 위의 담요를 적셨다.
어깨가 조용히 들썩였고, 울음은 말 대신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밤—
리차드는 마음을 굳혔다. 린을 다시는 그 지옥 같은 클럽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악몽같은 밤’을 끝내 주겠다고. 더는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숨죽이지 않도록, 그녀가 다시 세상을 향해 웃을 수 있는 날까지—곁에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