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뭘 해서 돈을 받는 사람인가
내가 담당하는 고객사는 지방에도 큰 사업장을 두고 있다. 그곳에 있는 고객을 만나기 위해 때때로 지방 출장을 가게 된다. 당연히 출장 가는 데 드는 교통비, 숙박비는 회사에서 대준다. 그 외에 출장 가서 돈 쓸 일이 있으면 법인 카드로 결제한다. 거기에 더해서 출장비(많은 사람들이 일비라고 부르는)도 얼마 정도 더 받을 수 있다. 이 정도면 일 년에 서너 번 정도는 해볼 만한 것 같다. 하지만 일주일 단위로 이렇게 출장을 다녀야 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하고 영업 사원을 그만뒀을지도 모르겠다.
23년 연말에도 지방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을 다녀와서 출장 내용을 정리하면서 출장비 승인 요청도 함께 올렸다. 그런데 팀장님께서 따로 연락을 하셔서 24년부터는 출장비를 요청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제품을 팔아서 인센티브를 받는 조직이고, 출장도 따지고 보면 제품을 더 잘 팔기 위해서 가는 것이니, 영업 사원은 출장비를 받기보다는 출장 다니면서 실적을 잘 내서 인센티브를 더 받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회사 입장에서 출장비 몇 푼이 아까워서 안 주겠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출장비 안 받는 대신, 출장 가서 법인 카드로 맛있는 거 많이 사 먹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 사실 출장 가서 마음먹고 쓰면 출장비 정도는 금방 뽑고도 남는다. 게다가 팀장님이 내 기분 상하지 않도록 정중하고 차분하게 잘 말씀해 주셨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이 이야기가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팀장님께서 이런 불편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방식을 보면서 또 한 번 배웠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일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는 '파는 사람'이고, 많이 팔수록 인센티브를 받는다. 많이 팔려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근이 많아지게 된다. 파는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며칠 떠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외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엔지니어들은 지방에 가서 따로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실적이 되지는 않으니 출장비를 받는 게 맞겠지만, 나는 이런 활동들을 통해 실적을 잘 냈다면 그것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일을 할 때의 정체성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바쁘고 정신없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 방향을 다잡는 기준이 된다. 또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못 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내가 회사에 무언가를 요구하려고 할 때, 내 목소리를 내는 근거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업 사원이 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나 스스로 '파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 같다. 정체성을 바꾼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가르치는 사람에서 파는 사람이 되는 길에,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