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전화는 받겠습니다
얼마 전에 목-금-월-화 4일 휴가를 내고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행사나 출장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여행으로 해외에 나가는 건 거의 10년 만인 것 같다. 나로서는 정말 큰맘 먹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휴가 동안에는 되도록이면 일을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어야 말이지. 나의 분신과도 같은 회사 노트북을 가방에 챙겼다. 이제는 가방에 노트북이 없으면 허전할 정도다. 언제 전화비가 쏟아져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여행 기간에 맞춰 로밍 서비스도 예약했다. 이쯤 되니 로밍에 드는 돈 정도는 회사에서 받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천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을 때부터 전화가 쏟아졌다. 사소한 문의 전화도 있었지만 이달 말까지 끝내야 하는 중요한 계약 관련된 연락도 있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계약이다 보니 여행하는 내내 하루에 서너 번씩은 통화한 것 같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을지 모르니 전화 한 통이라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휴가여도 통화 한 통 한 통이 나의 숫자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뿐만 아니라 메일도 수없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저녁마다 숙소에서 급한 메일들에는 답장을 써야 했다. 결국 이번 휴가에도 회사를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휴가 동안에는 속세와 인연을 끊는 듯한 느낌으로 일과 관련된 것에는 손도 안 대는 것 같다.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만 봐도 그렇다. 그들은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사이에 길게 휴가를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에는 회사에서도 이들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는다. 사실 프로젝트 잘 끝내고 휴가를 간 것이니 급하게 연락할 일이 없기도 하다. 반면 우리 영업팀 사람들은 휴가 동안에도 전화받고 메일 쓰는 정도는 다 하는 것 같다. 다들 자신이 맡은 고객사와 관련된 일은 내가 가장 잘 알기도 하고, 그걸 일일이 다 설명하기 어렵다 보니 주변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나도 휴가 동안에 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신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이유들을 몇 가지 생각해 냈다. 첫 번째는 휴가 동안 일을 안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일을 1순위에 두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아무리 급한 일이어도 곧바로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급하지 않은 일은 미뤄두었다가 휴가 끝나고 해도 괜찮다. 두 번째는 휴가 동안 일을 아예 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휴가 중에 업무 연락이 왔을 때 오히려 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휴가라도 전화 정도는 받고 급한 일 정도는 한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면 휴가를 편하게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내가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스템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바꿀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합리화를 하게 된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도 휴가 동안 잘 쉬고 재충전하고 돌아와서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에서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일 생각은 완전히 잊고 푹 쉬는 것이 휴가를 잘 보내는 방법일 수 있다. 만약 휴가 동안에도 일과 관련된 생각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매일 쏟아지는 일들을 쳐내느라 미처 하지 못했던 고민들을 하는 것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의 자신의 역할이나 앞으로의 성장하고자 하는 방향, 장기적인 커리어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 말이다.
회사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회사가 전부는 아니다. 지금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가장 많은 부분을 회사 생활하는 데에 쓰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옷을 한 겹 벗어던지듯 회사원이라는 정체성도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나에게서 깨끗이 벗겨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통 때에는 나라는 사람에게서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빼고 남는 부분을 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다. 가끔 있는 휴가 때에야 비로소 그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잘 가꾸어야 회사 생활도 더욱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휴가 때, 일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고민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