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 생각해 봤더라면
고객들은 우리 제품을 1년씩 구독해서 쓰고 있다. 얼마 전에 한 고객이 구독 갱신 날짜에 맞춰서 제품의 사양별 수량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워낙 많이 사주는 고객이기도 하고, 고객사 내부적으로 중요한 업무를 하는 부서여서 우리 회사에서도 그렇고 제조사에서도 그렇고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었다. 그런데 고객은 사양별 수량은 바꿔야 하지만 예산이 정해져 있어서 계약 금액은 작년에 비해 많이 늘리지 못한다고 했다. 작년에 계약했던 것과 비슷한 금액으로 맞추려면 우리 회사가 제조사에 주문하는 금액을 다시 협상해야 하고, 고객과도 단가 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 특히나 올해 상반기에 제품의 권장 소비자 가격 자체가 인상되었는데, 제조사에 단가가 오른 폭을 줄여달라고 해야 하는 한편, 고객에게는 단가가 올랐으니 계약 금액이 어느 정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득해야 했다.
나는 제조사의 구독 갱신 담당자와 며칠 동안 밀고 당기기를 했다. 그는 우리 회사와의 계약 금액을 어떻게든 높여야 하고, 나는 제품을 최대한 싸게 받아와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적절한 합의 선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리저리 시뮬레이션한 끝에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금액을 맞췄다(고 생각했다). 그 금액을 토대로 이번에는 고객에게 제안할 견적서를 만들 차례였다. 한참 동안 고민해서 만든 견적서를 우리 팀장님께 한 번 보여드렸다. 제조사에서는 이러저러한 만큼 할인해 주기로 했고, 고객에게는 이만한 금액으로 제안해 보겠다고 내가 만든 견적서를 설명드렸다. 팀장님은 고생했다고, 그럭저럭 잘 만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근데 고객은 엄청 힘들게 만든 견적이라고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너무 쉽게 그냥 깎아주는 거 아니야?'
그때 나는 무척이나 충격받았다. 그리고 내가 영업 사원으로서 '숫자'를 대하는 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수학 문제를 풀어서 답을 찾듯이 견적을 만든 것이었다. 물론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아주 합리적인 견적이기는 했다. 고객이 보기에도 작년 계약 금액 대비 많이 오르지 않아 받아들일 만한 금액 같았다. 하지만 영업 사원이라면 이 숫자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우리 회사의 수익을 약간이라도 더 높일 수 있도록 제조사에 조금 더 협상해서 할인을 더 받을 방법이 없는지, 고객에게도 조금 더 높은 금액을 제안할 수 있을지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만약 고객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 더 할인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번 견적을 만들면서 어떤 습관 하나가 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고등학교 때의 나는 시험 문제를 한 번 풀고 나면 그것을 다시 풀어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해도 성적이 그럭저럭 잘 나왔다. 그게 문제였다. 한 번 답을 정하면 그것을 의심하고 한 번 더 돌아보기보다는 내 답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습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습관이 이 나이 먹고 일할 때까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명색이 영업 사원인데, 고객에게 내미는 견적서에 우리 회사의 매출과 이익을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라고는 전혀 없이 수학 문제 정답 같은 숫자만 적어놨다니 말이다. 다행히 고객이 견적서를 받고는 더 따지지 않고 넘어갔으니 망정이지, 이것저것 재보고 까다롭게 굴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물론 공부 머리가 좋을수록 유리한 업무도 분명 있다. 하지만 실제로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자가 생각하는 정답이 다 제각각이다. 물건을 파는 쪽에서는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고 싶어 하고, 물건을 사는 쪽에서는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하면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큰 이득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업 사원은 이 이해관계의 틈바구니에서 일이 되도록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의 답을 하나 찾았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상대가 내세울 만한 답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그것들에 대해서 대응할 만한 카드들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이토록 기본적인 것들을 이렇게나 늦게 꾸역꾸역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