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이 전해지는 길에 서 있는 사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혹시나 나쁜 소식일까 싶어 괜히 긴장이 된다. "오징쌤이시죠? OO 책임님께 소개받고 연락드려요." 이 말을 한마디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아버린다. 영업 사원으로서 너무 듣기 좋은 한 마디이다. "저번에 주셨던 견적서 내용대로 계약할게요"라는 말 다음으로 기분 좋은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하루 내내 쏟아지는 전화비 사이에서 이런 전화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날은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다. 일 잘하는 영업 사원은 이런 전화가 더욱 자주 걸려오도록 고객들과 넓고 깊은 관계를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이전에 타율이 낮아도 타석을 많이 만들어내는 영업 사원이 좋은 영업 사원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고객이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하면, 귀한 타석이 공짜로 만들어지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진 타석은 안타로 이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고객이 어디선가 우리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나 우리 제품을 쓰는 사례를 봤고, 그때 좋은 인상을 받아서 우리 제품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일 잘하는 영업 사원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약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고객사 직원들끼리 나를 소개한다는 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일단 고객사 내부적으로 우리 제품에 대해 좋은 소문이 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즘 경기가 침체되면서 많은 회사들이 IT 투자 예산을 줄이고 있다고 한다. 요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생성형 AI를 활용한 기능이 없는 제품은 살아남기 힘든 분위기인 것 같다. 영업 사원이 성공하려면 자신이 서 있는 무대를 잘 골라야 한다. 시장 분위기가 침체된다는 건 내가 서 있는 무대 자체가 좁아지고 기울어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객사 직원들이 우리 제품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자기들끼리 입소문까지 내주고 있다면 고객사에서도 우리 제품에 대한 투자를 줄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B2C 영업에서 입소문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입소문이라는 것은 어쩌면 B2B 영업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한국에서 B2B 영업을 할 때, 고객들은 '어디 어디에서도 이 제품을 이만큼이나 쓰고 있어요'라는 레퍼런스를 무척 궁금해한다. 그 레퍼런스는 같은 업계의 경쟁 회사, 같은 재벌 그룹의 다른 계열사, 같은 회사의 다른 부서 등등 다양하다. 그렇게 레퍼런스를 전해 들으면 고객사 사람들, 특히 임원들은 '저기서 이걸 그렇게 잘 쓰고 있다고? 그럼 우리도 얼른 따라가야지'라는 식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B2B 마케팅이라는 것은 좋은 레퍼런스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소문이 전해지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제품의 제조사에서는 소문이 전해지는 길을 만들기 위해 틈만 나면 콘퍼런스나 웨비나 같은 걸 열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우리 제품을 잘 쓰고 있는 사람들을 모셔와서 그들이 자신의 입으로 우리 제품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는지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제조사로서는 제품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발표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참가자들은 다양한 사례들을 전해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이런 행사에 와서 우리 제품을 알게 된 사람들 중에는 우리 제품을 구매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거의 달인 수준으로 잘 쓰게 되는 이들도 종종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 안에서도 금방 유명해진다. 그 회사 안에서 우리 제품을 쓰려면 꼭 이 사람에게 질문을 하거나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영업 사원 입장에서는 각 회사나 부서에서 이처럼 허브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좋은 관계를 맺을수록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이런 사람들이 "오징쌤한테 연락해 보세요"라고 한 마디 해주면 나는 "오징쌤이시죠? OO 책임님께 소개받고 연락드려요."라는 전화를 수두룩하게 받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