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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Sep 01. 2020

답답하고 속 깊은 아날로그틱한 감성을 찾습니다



유튜브에서 10분짜리 짧은 영화 리뷰 영상을 하나 보게 됐다. 줄거리는 이렇다.  

엄마를 잃은 아기 치타 한 마리를 한 가족이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기르게 된다. 넓은 초원까지는 아니지만 치타를 기를 농장도 있었고 아기 치타를 가족처럼 이뻐해 주는 사람들이다. 농장 주인인 8살 남자아이의 아빠는 아주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이지만 건강이 좋지 못해 농장에서 요양 중이었단다. 아빠는 아이가 치타를 훈련시킬 수 있게 오토바이를 가르쳐주고 아이는 열심히 치타를 훈련시키며 둘 사이에 깊은 정이 든다. 아빠는 늘 아이에게 말하길 치타가 크면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어느덧 성장한 치타를 본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기로 한 며칠 전, 아빠는 그만 숨을 거둔다. 아이는 남은 가족과 도시로 이사를 오지만 보호소에 치타를 뺏기기 싫어 가출을 하게 되고 예전에 아빠와 온 적 있던 광야로 오토바이를 타고 치타와 함께 오게 된다. 둘은 함께 험한 사막을 헤매고 죽을 위기를 넘고 뜻밖의 인연도 만난다. 야생으로 돌아온 치타는 여전히 아이를 사랑하지만 본성이 깨어나면서 야생의 모습을 하나씩 드러내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 먹이 앞에서 아이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처음으로 보이게 된다. 그 모습에 상처를 받은 아이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치타는 결국 야생의 습성과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그것이 치타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는 걸.  치타는 어느새 사랑하는 짝도 만났고 매번 실패하던 사냥에도 성공하며 완벽한 야생의 모습을 갖춘 듯하다. 이젠 서로의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완벽히 이해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치타를 야생으로 돌려보내기로 한 아빠와의 약속을 당당히 지킨 후 치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사랑하는 엄마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이컨택트 프로그램 영상을 보게 되었다.


아내는 난독증으로 중졸 학력을 가진 남편을 30년간 뒷바라지를 해왔단다. 그 사이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술독에서 벗어났고 막노동 대신 강연을 다니고 출판도 하며 머리는 희끗하지만 다양한 활동을 눈부시게 하고 있다. 그런 남편에게 스튜디오에서 마주 앉은 아내가 말한다. 우리 이혼하자고.

tv 출연까지 해서 아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일까 내심 기대하며, 긴장한 듯 수줍은 미소를 띠던 남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한동안 말문을 잊지 못하고 아내를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아내는 지난 30년간 24시간 함께 하며 '나'는 없었던 것이, 너무나 평범한 자신에 비해 남편은 너무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라 이제는 벅차다는 것이, 더 늦기 전에 나도 내 꿈을 펼쳐 보고 싶다는 것이 이제나마 혼자가 되어 보고 싶은 이유라고 한다.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갔다. 남들보다 늦어도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남편은 조금만 더 함께 해달라고  부탁도 하고 당신의 꿈도 그 후에 밀어주겠다고 약속도 한다. 함께 좋아서 하지 않았냐고 반문도 한다. 부부의 날에 대상까지 수여한 우리인데 세상에 이런 일은 있으면 안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아내는 말한다. 딱 1년이라도 안식년을 가지게 해주지 않으면 이혼하고 싶다고.

아내는 긴 호흡으로 다시 이야기한다. 자신은 그간 님편을 위해 긴 세월을 희생하며 살았다고, 그동안 사실 너무 힘들었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이번엔 차분해진 음성으로 무겁게 입을 뗀다. '그동안 내가 미안합니다'라고. 그리고 자신의 꿈을 잠시 미뤄두고 1년간 이제는 자신이 아내를 내조하겠노라고 호탕하지만 진심 어린 눈빛으로 약속하는 남편. 아내의 입가에 비로소 환한 미소가 퍼진다. 아내의 미소를 본 남편의 얼굴에도 행복한 눈웃음이 번진다. 두 사람은 뭔가 말개진 모습으로 촬영장을 나란히 걸어 나간다.




오랜만에 집에 가던 날, 아빠에게 숲에 같이 가자고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굉장히 근사한 명소가 있어 아빠랑 같이 가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다. 장마 끝난 후의 무더위가 기승인데 오랜만에 집에 와서 아빠랑 선풍기 바람이나 쐬며 집에 갇혀있기는 어쩐지 억울했다. 하루 종일 선풍기 바람만 쐬며 여름을 나고 계셨을 아빠도 분명 좋아하시리라. 딸과 단둘이 나들이를 한다고 들뜨신 듯 분명 숲에 간다고 했는데 아빠는 최근에 새로 닦으셨다는 구두를 신고 나오셨다. 생각해보니 아빠랑 둘이 외출하는 게 우주 최초였다.

그렇게 모처럼 기분을 내고 가던 외출 길은 그러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차편에 문제가 생겨 땡볕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아빠의 부릉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게 되었다. 이것도 우주 최초였다. 70 넘긴 할아버지가 모는 오토바이라고 하기엔 뒷좌석도 높고 크기도 꽤 커서 뭔가 어색하지만 사실 아빠는 베테랑 라이더. 뒷좌석에 여자 친구분도 태우신 듯, 큰 별이 그려진 깜찍한 빨간 헬맷도 씌워주셨다. 힘들게 출발했지만 그래도 목적지에 도착하니 기뻤다. 아빠에게 좋은 곳을 보여드릴 생각에 들떴다.


그러나 출발할 때부터 "수웁?" 하며 연거푸 몇 번이나 목적지를 물으시던 아빠는 입구에서 적잖이 실망하시는 듯했다. 그냥 숲인데 입장료가 5000원이라는 사실에는 위화감까지 생기시는 듯했다. 여기 뭐가 있냐고 해서 그냥 여기 대나무 숲이 영화 촬영지고 해서 시원하게 걸으려고 한다니 집 근처가 다 숲이라며 이해하기 힘드신 표정이다. 나도 김이 살짝 빠진다.


"여기 뭐 볼 게 있어서 사람들이 이래 오노?"

"담배도 좀 태울 수 있고 술도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 좋지. 아빠는 일편단심 바다지."

아빠 말도 맞다.

"바다는 낮에 가면 뜨겁고 햇빛 피할 곳이 없잖아요."

"아빠. 나는 치료를 오래 해서 그런지 이렇게 산소가 많이 뿜어져 나오는 숲이 너무 좋더라. 나무 냄새랑 흙냄새 나는 게 좋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다. 하지만 숲을 좋아하는 나와 바다를 좋아하는 아빠는 이곳에서 지금 함께 기쁠 수가 없었다. 아빠와 함께 건강한 나들이를 즐기고 싶었던 나의 꿈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냥 선선한 숲길을 호젓하게 걷는 기쁨을 전해드리고 싶었던 건데. 그게 아빠에겐 어색하거나 심심하기만 한 재미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출발할 때부터 별로 내키지는 않으셨는데 나랑 같이 나가고 싶어 나오셨단다.


내 마음대로 상대를 종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좀 더 세심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어도 묵묵히 따라와 주시는 아빠라서, 그래도 내내 마음에 안 든다고 불만사항을 마음에만 담아두지 않으시고 따박따박 표현해주시는 뒤끝 없는 아빠라서 고마웠다.


원래 계획의 3분의 1도 못 미치는 짧디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에 조금 앞서 가던 가족 무리에서 한 아버님의 투덜거림이 우리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기(이것이) 뭐 볼 기(것이) 있다고 이래(이렇게) 오노(오지)? 내사(나야) 하나도 볼 거 없다"

아버님을 모시고 가던 부부도, 같이 걷던 어머니도 아무 말이 없다. 저 집, 분위기 어쩌니.


잠시 생각했다. 비록 상대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저 같이 좋아할 정도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깊이일까 하고.

흔히 '당신이 좋다면 저도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런 마음.

 그런 아날로그 한 마음이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쩌면 그런 답답하고 깊은 마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조심히 생각해봤다. 은근히 참 들어보고 싶은 말이다. 역시 나는 이기적인 면이 다분한 인간이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혹시 그런 마음을 만나면 모르고 넘어가지 않도록, 꼭 눈치채고 가도록 내 마음의 촉을 더 갈아야겠다고,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나도 그런 마음을 품을 일이 한 번쯤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마음은 얼마나 행복한 마음일까, 상상만 해도 아날로그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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