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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Feb 09. 2019

우리가 이별을 준비한 시간

시간이 주어진 것도 이유가 있다

"바퀴벌레! 으~~ 바퀴벌레 기어간다~~"

 급박한 손짓으로 내 이불을 들춰내며 말하는 할머니 목소리에 숨을 멈춘 채 0.1초 만에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방문 바깥까지 뛰쳐나갔다.

할머니가 아주 만족한 얼굴로 나를 보시며 씻으라고 말씀하시자 그제야 할머니의 고단수 연기인 것을 눈치챘다. 그 후 몇 번 더 속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 나는 할머니와 매일 아침마다 전쟁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오면 이미 늦은 시간이라 늘 잠이 부족한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든 깨우려는 할머니의 전략은 이랬다.


제1단계. 정성스럽게 갓 지은 새벽밥으로 아침을 차려놓으시고 낭랑한 목소리로 나를 깨우신다.

"일나라. 일나서 밥 무라"(일어나서 밥 먹어)

아무 반응이 없으면 제2단계로 들어간다.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고 있는 나를 흔들거나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한참동안 내 등짝을 두드리신다.

역시나 반응이 없자 일단 할머니도 자리로 돌아가 누우신다. 새벽밥을 짓느라 피곤하셨기에. 그러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는 기척이 없자 슬슬 화가 나신 할머니.

"야! 학교 안 가나?"

"니가 지각하지 뭐. 지각해뿌라 마"

혼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시다가 급기야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셔서 '이노무 가시나'를 외치시며 혼낼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와 손도 아까우셔서 발가락 끝으로 바닥에 누워 자는 내 머리를 발로  밀어대시거나 엉덩이에 하이킥을 날려 '둘구 차시며' 깨우시지만 역시나 역부족. 이번에는 애원을 하신다. 제발 좀 일어나라고. 이쯤 되면 기력이 거의 바닥나버리신다.

그러나 정말 일어날 생각이 1도 없는 나를 보시고 결국 할머니는 진이 다 빠져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얼마 뒤. 시간은 이미 데드라인을 넘어가고 있다. 이제 일어나도 지각이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화가 아주 많이 난, 그러나 아주 낮은 중저음 목소리로 딱 한 마디 하신다.


"...

야."


 그때다. 순간 심장이 튕겨쳐 나갈만큼 깜짝 놀라 눈이 똥그래져서 깨는 나. 그렇게 실신한 거 아닌가 할 정도로 아무 반응 없이 자던 내가 크지도 않은 할머니의 그 한 마디에 드디어 반응을 보인 것이다.

"몇 시야!? 아아~~~~!!! 어떡해! 왜 나 일찍 안 깨웠어?"하고 말하며 씩씩거리고 일어나 온갖 짜증을 다 부리며 등굣길을 나서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어이가 없고 말문이 막혀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혹은 도대체 왜 저러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시곤 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것이 우리의  '매일' 아침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속 꽤나 썩이는 손녀였다. 밖에서는 순둥이같이 조용하기만 한 나였지만 집에서는 소심하고 신경질적인 못된 아이였으니 말이다. 삼 남매 중 유독 할머니의 사랑의 매를 많이 맞은 이유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학교에서 친구들의 생일잔치에 다녀온 후 나도 생일잔치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어린 눈에 생일을 맞은 친구들이 받는 선물이 너무나 갖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이들의 생일잔치라는 것에 대한 개념은 없는 집이었고 언니도 남동생도 해주지 않는 생일잔치를 해달라는 철없는 내 고집이 얄밉기도, 속상하기도 하셨으리라. 그러나 결국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탓에 KO를 당하고야 마신다. 그렇게 할머니표 생일상을 받아내고야 말았지만 사실 겨우 케이크 하나에 탄산음료 하나, 과자 몇 봉지가 다였던 빈약한 생일잔치에 와주는 친구들은 다섯 손가락이 넉넉할 정도로 소수였고 당연히 생일선물이라는 콩고물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헛똑똑이라는 별명을 지어두시고는 내가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비웃으시며 놀리곤 하셨다.  유치원도 안 나온 내가 입학 전에 혼자 한글을 다 떼고 학교를 들어간 탓에 똑똑한 아이라고 내심 기대들을 했지만 아침마다 열쇠를 가져가는 걸 깜빡해서 다시 돌아오기 일쑤인가 하면 심부름을 보내면 거스름을 몽땅 길바닥에 뿌리고 오기도 했다. 어쨌든 할머니의 말대로 나는 헛똑똑이였다. 할머니는 나의 약점을 깊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 건 내가 어른이 되어 독립을 하면서부터였다. 할머니 옆에 붙어있던 삼 남매가 하나 둘 떠나고 아빠와 단 둘이 남게 된 할머니는 어느새부턴가 내가 전화를 드리면 평소 안 하시던 말씀들을 하셨다.

  

"요새는 안 넘어지나? (버스에서 계단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심심하면 넘어져 무릎을 깨고 오는 게 내 특기였다) 니 돌 때 형편이 어려워 떡을 안 해서 그렇다"


할머니 말씀처럼 내 돌 사진에 떡은 없다. 그렇지만 돌 떡과 잘 넘어지는 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다.


"할매가 어릴 때 때리고 한 거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엄마 없이 큰다고 어데가서 욕 얻어먹을까봐 할매가 그랬데이."


사실 내가 맞을 짓 한 거 나도 안다. 말을 참 못 되게 하는 버릇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맞아도 싸다.

 

"돈 안 갖고 와도 된다. 그냥 온나. 할매가 보고 싶어 그란다."

명절날 유일하게 내려오는 둘째 손녀딸이 차표를 못 끊어 못 내려가게 됐다는 말에 할머니가 울며 말했다. 사실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갑작스런 해고 등을 겪으며 생활조차 힘들었지만 빈 손으로 내려갈 수도 없어 못 내려간 것이었다. 결국 전화를 끊고 할머니의 우는 소리에 나도 눈물이 터져버린 날이었다.


 늘 곱게 차려입는 걸 좋아하셔서 동네 꽃할매로 이름을 날리고 노가다로 다져진 체력으로 아흔 가까운 연세까지 동네 빌라 건설 소장의 신임을 한 몸에 얻으시며 쌈짓돈을 모으시던 건강쟁이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 병상에 누우셨다. 허리뼈 부상이셨다. 연세가 많아 이렇다 할 치료도 못 받으시고는 요양병원과 집을 오가시며 서서히 기력을 잃어가셨다. 그 사이, 전보다 훨씬 자주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도 가 드리고 문병도 꼬박꼬박 가고 집에도 자주 갔다. 식구들의 도움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이 헛똑똑이 손녀가 아프다는 사실은 특급비밀로 해 두었다. 그런 탓에 할머니 곁에서 자는 날에는 몰래 가발을 벗고 비니를 눌러써야했지만 먼저 아무렇지 않은 듯 씩 웃어 보이면 할머니도 그냥 웃고 마셨다. 늘 바빠서 자주 오지 못하던 손녀가 이상하니 자주 얼굴을 보이며 챙겨댄다고 생각하셨는지 한번은 안 바쁘냐고 물으시며 걱정까지 하셨지만 휴가 받았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우리의 남은 날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아마 가족 나들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잠깐 거동이 회복되신 짧은 기간, 한번은 우연히 언니네 가족들과 남동생까지 함께 내려와 온 가족이 가까운 바다로 갑작스러운 나들이를 가게 되었던 날이었다. 할머니는 아마 태어나 처음 가보셨을 펜션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증손녀들까지 거느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간을 가지셨다.

목욕탕을 갈 수가 없어 너무 꿉꿉하던 차였는데 예쁜 욕조에서 두 시간동안 손녀의 때밀이 서비스를 만끽하신 일, 그동안 모은 쌈짓돈을 머릿수에 맞게 다 나누어 아들 딸 손자 손녀들에게 일일이 봉투를 건네 주신 일, 평생도록 못 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밤이 깊도록 쏟아내신 일 등 그날의 시간은 마치 누군가 할머니를 위해 짜 놓은 듯 너무나 완벽했다. 홀가분해하시며 편안해하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일 이후 할머니는 다시 병상에 누우셨고 영영 일어날 수 없게 되셨다. 새해가 밝았고 명절날 다시 할머니를 찾은 나는 그간 식사며 대소변까지 누워서 하셨을 할머니의 온몸 구석구석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고 또 닦아드렸다. 그리고 잠드신 머리맡에 앉아 할머니를 마음으로 먼저 놓아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틀 후, 잠드시듯 고요히 눈 감으셨다는 소식을 아빠로부터 듣게 되었다.

 

 할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늘 깊이 슬펐다. 할머니를 보내드린다는 건 내 마음에서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를 보내드릴 본격적인 마음의 준비기간으로 1년이 주어졌던 것 같다. 그 1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드리고 싶은 것을 내 체력이 될 때마다 미련 없이 다 해드릴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할머니가 고통 없는 세상에 가셨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마음속에 깊은 한이 하나 박혀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아픈 이후, 내가 가던 길은 막혀버렸지만 어쩌면 그러므로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보니 바로 그때가 아니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아파서 임종을 맞이하시게 된 그 시간동안에 나 역시도 아파서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었기에 할머니와 함께 그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와 생각하니 그때가 할머니와 함께 할 마지막 기회였다.

 열흘 후 할머니의 첫 번째 기일을 맞이하게 된다. 가족들과 할머니의 기일을 지내러 할머니와 함께 했던 작은 바닷가를 찾아봐야겠다. 소박하게나마 함께 한 추억들이 다시금 따뜻하게 떠오르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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