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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Feb 16. 2019

오늘, 나도 살아갈 이유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

 얼마 전 김창옥 교수님의 멋진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분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너무 재밌어서 웃기 위해 그 채널을 구독하는 나는 이 날 한 남자의 멋짐을 봐 버렸다. 방척객과의 Q&A 시간이었는데 한 남자 방척객이 본인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강의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실 때 누군가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힘을 받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십시오'라며 마지막 말을 끝냈고 그 말을 들은 김창옥 교수님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다가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 눈물의 의미를 사실 그때 나는 몰랐다. 그냥 맨날 웃겨주시던 분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가리고 우는 모습이 괜히 멋있어 보였을 뿐.




 밥을 먹다가 댓글 알람이 울려 블로그 댓글을 읽고 있었다.

그날도 내가 쓴 글에 누군가(블로그 방문객 대부분이 나 같은 암투병 환우분들이다) 내게 이런 비밀 댓들을 남겨주었다.

"작가님을 보며 많은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늘 밝은 모습 보여주세요."

잠시 입으로 들어가던 밥을 멈추었다.

오후의 햇살이 내가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거실의 식탁까지 밀려들어와 환해진 그곳에 담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눈물이 툭. 툭. 식탁 위에 떨어졌다.




 스무한 살. 1월이었고 2월이 되면 2학년 등록금을 내야 했다. 그럴 돈도 없었고 학점 관리는커녕 적응 조차 힘든 학교로 다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악마의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 이 지구는 너 따위가 살 곳이 아니야.'


 사실 어린 시절부터 살고 싶은 생각보단 죽고 싶은 아니, 없어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더 많았다. 이겨내기보다는 포기가 늘 빨랐다. 앞날에 대한 희망보다는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런 내가 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강한 곳이었고 두려운 곳이었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고 때론 고통스러웠다.  그런 세상을 더 이겨내고 살 자신이 없었다.

여기까지였다. 그 말대로 지구를 떠나 주기로 했다.


 아장아장 약국에 걸어 들어가 콩닥거리는 심장으로 수면제를 주문했다. 다행이다. 가져간 전 재산으로 살 수 있어서. 병원 처방전 없이도 살 수 있는 정도의 약 효능은 그렇게 세지 않다는 걸 나는 몰랐다. 일단 최대한 많은 약을 한 번에 털어 넣기로 했다. 절대 깨지 않도록 말이다. 집에서 통에 든 알약 100개를 모조리 다 까서 하나하나 할머니의 절구에 넣고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탔다. 국그릇 하나 분량이 나왔다. 그리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한 시간, 약사발을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 너무 써서 역하기까지 했다.

시간은 지나 식구들이 하나 둘 집으로 들어왔고 할머니가 잔치집에 다녀오시는 길이라 양 손 가득 맛있는 잔치음식을 싸오셨다. 순간 내 눈 앞에 탕수육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 일단 먹고 싶어서 먹기 시작했다. 먹다 보니 잡채도 보이고 만두도 보인다. 폭식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먹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누워서 티브이를 봤다. 슬프거나 하진 않았다. 모든 것이 단지 무감각했다. 내일이면 가족들이 놀랄 거란 생각도 너무나 남일처럼 아무 일도 아닌 것같이 멀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새 나도 가족들도 모두 잠이 들어버린 깊은 새벽.

갑자기 잠을 깰 틈도 없이 몸이 튕겨 쳐 나가듯 화장실로 달려갔다. 엄청난 구토가 시작된 것이다. 꾸역꾸역 먹은 음식이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더니 곧이어 쓰디쓴 약 냄새가 올라왔다. 역겨웠다. 깨어버리다니.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고 어느새 다시 아침이 밝더니 어느새 아침을 먹으라고 깨우시는 할머니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어설픈 자실시도는 어설프게 끝났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해 계속 누워있기도 하고 한동안 겨우 기어 다니며 생활했고 그 한동안 심한 수전증을 보이는 등 몇몇 부작용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모든 신경이 돌아왔다. 알약을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증상은 1년 가까이 간 듯하다.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뭘 해도 난 안 된다는. 안 될 거라는. 사실 그렇게 죽지 못한 이후로도 한동안 무기력해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염없이 울고 또 울기만 했었다. 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 세계를 벗어났고 평범한 사람들 흉내를 낼 정도까지 올라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재발했지만 전보다는 조금 더 보고 싶진 사람이 있었고 조금 더 견뎌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가장 크게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위배되는 죄의 대가를 받고 싶지 않은 소심함이 나를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전이 판정을 받고 1주일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밥도 잘 안 먹었다. 충격을 받아서 혼자 있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들은 '삼중음성 유방암'(그때까지 나는 내가 난치성 유방암이란 걸 몰랐다)이 도대체 뭔지, 나의 생존율은 얼마나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과연 치료는 잘 되는 편인지, 어디로 가면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등 긴급 대책을 세우느라 눈만 뜨면 정보를 파고 또 파다가 녹초가 되어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던 것다. 그냥 병원에 맡기기보다는 앞으로 있을 치료에 대해 모든  결정의 주체가 결국 나여야 한다는 생각에 뭐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3중 음성 유방암 폐 전이에 대한 정보를 다 끌어모을 기세로 여기저기 파헤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정보는 많이 없었고 생존자도 찾기 어려웠다. 절망적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찾아서 하기로 마음먹고 적극적으로 여기저기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그랬다. 과거의 나는 분명 어떻게든 빨리 죽고 싶어 했던 '못난 놈'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10년이 훌쩍 넘은 뒤의 나란 사람은 죽음의 길목 앞에서 살기 위해 발장구(발버둥이란 표현은 너무 숭고하기에)를 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며 용기를 얻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안다. 살고 싶어 정보를 뒤지며 다닐 때 사실 내가 찾고 싶었던 건 희망이었다.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도 나을 수 있고 건강하게 5년이고 10년이고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줄 희망. 그 마음을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꼬박꼬박 블로그에 나의 존재를 남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혹여 내 경과가 좋아진다면 그 사실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바라면서. 그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투병을 하면서도 의외로 싱싱하게 잘 지내는 나란 사람의 존재에 반가워하며 암판정으로 두려움과 걱정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하나 둘 내 공간에 찾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당신을 보니 희망이 보이네요"란 그 말을 이제 내가 누군가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누군가의 그 한 마디에 과거, 그렇게 죽고 싶어하던 내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 이야기를 하며 사실 나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깊이 하기란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같았을 누군가도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고 아프던 내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 치유되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힘들지만 내 이야기를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어쩌면 그럴 날이 꼭 올 것을 믿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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