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킴라일락 Feb 24. 2019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모든 결정의 주체는 결국 자신이다

 새벽 6시가 넘어간다. 극도의 긴장 상태였지만 밤을 하얗게 불태웠으니 잠이 쏟아질 때도 됐다. 결국 그렇게 잠이 들었지만 오후 1시 다시 눈을 뜨자마자 바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배는 고프지만 밥을 먹고싶지는 않았다. 암이 폐로 전이됐다는 소식을 받던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3일 내내 그렇게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검색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키워드는 이랬다. ‘유방암 4기’, ‘3중 음성 유방암’, ‘유방암 폐 전이’, ‘전이성 유방암 치료법’, ‘유방암 4기 생존율’...

 주변에 4기 유방암 생존자도 찾을 수가 없었고 정보를 구할 수도 없어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치료법이 있느냐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원하는 답이 없었다. ‘기적의 OO버섯’, ‘OO병원 환자수기’. ‘신 유전자 치료법’. 그렇게 내가 찾은 거라곤 진실 없는 광고성 글뿐이었다. 그리고 실제 경험자들의 말이 아니라 이론만 빠삭한 믿지 못할 지식들뿐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찾는 희망이 전혀 없었다.       

 분명 2년 전, 나는 다짐했었다. 만에 하나 내 병이 다시 재발되거나 전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도 절대 항암치료는 받지 않을 거라고. 그만큼 당시 항암치료는 힘들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막상 전이가 되고 나니 지금 중요한 것은 항암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었다. 항암치료건 뭐건 치료는 당연한 것이었고 문제는 어떤 치료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 스스로에게 간사함을 느끼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가능한 오랫동안 버티고 싶었다. 꼭 나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버틴다는 말이 맞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폐에 종양이 생겼다는 말에 사실 많이 긴장했다. 병원에서는 치료방법과 치료 일정이 다 잡힌 상태였지만 초기암일 때와 달리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복잡한 마음과 두려움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고 피하고 싶은 핑곗거리라도 찾듯 다른 치료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찾고 싶었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도 싶었다. 그리고 그중 ‘내’가 판단했을 때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내 운명의 결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결국 마음만 앞섰지 어떤 정보도 찾지 못한 상태로 무작정 서울의 메이저급 병원에서도 진단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곳에서는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그렇게 병원에다 서울로 가보겠다고 의사를 확실히 밝힌 후 나의 운명이 바뀌었다. 의사로부터 인터넷을 뒤져서는 찾지 못할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기왕 가실 거, 임상실험하는 곳으로 꼭 가세요.”     


 역시 인터넷이나 붙잡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너무나 명쾌하고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받고 그렇게 날아갈 듯이 온몸이 가뿐할 수가 없었다. 지난 며칠간 고군분투하며 찾던 답을 받았으니 당연하다. 의사의 말을 따라 임상실험하는 곳을 찾고 절차를 밟으며 수많은 검사를 하고 서류를 준비하며 최종 오케이 사인을 받아 정식 연구 참여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과정이 힘들다는 생각도 없었고 지금까지 치료를 후회한 적도 없었다. 첫 항암을 시작하며 임상항암 궤도에 드디어 첫 진입을 시작할 때는 마치 큰 프로젝트 하나를 완수한 듯 뿌듯하기까지 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실험대상이 되긴 싫다’, ‘안전성을 보장받지 못했지 않냐’, ‘만약 못 되면 누가 책임 지냐’ 등 말 많은 임상실험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는 길이었다.



    

 갓 자라나기 시작한 머리털을 보여준다는 것이 부끄럽긴 했지만 체력을 키우고 싶어 얼굴에 철판을 장착하고 어렵게 수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파이팅 넘치게 시작한 수영은 불과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고관절 부분의 통증이었다. 무리한 운동이 아니었음에도 평소 사용하지 않던 부위라 그런지 수영강습은커녕 평소에도 의자에 앉아있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시작되었고 때때로 걷는 것 마저 불편해 다리를 절 정도가 되었다. 정형외과에서 속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점점 심해지는 통증으로 답답한 마음에 한의원에서 간단한 침술치료라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에 의논한 결과 ‘침술은 절대 안 된다’였다.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단호할 줄 몰랐다. 내가 통증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나 배려보다는 임상연구의 정확한 결과 도출을 위한 매뉴얼대로만 답변을 한 것이기에 한편으론 섭섭했지만 이해는 했다. 단, 내 몸을 전적으로 그 매뉴얼에 맡길 수는 없으므로 독자노선대로 움직이기로 나도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의원에 자주 갔다. 한주에 두 번씩 4주 내내. 많이 좋아졌지만 역시 병원엔 비밀. 그 후로도 종종 어디가 안 좋다고 느껴지면 나는 보란 듯이 신나게 침을 맞으러 간다.


 병원을 오래 다니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내 몸이 그때그때 필요한 건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나칠 정도로 역행을 하는 건 문제겠지만 말이다. 사실 전문가라고 해도 그들은 나처럼 이 병에 걸려본 적도 없고 나에 대해 100% 속속들이 다 알 수도 없다. 양방의학에 지대하게 기대는 나였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나도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날로 변해가는 것이기에 내가 필요한 정보는 내가 찾아서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므로 신중해야 하긴 한다.




 우연히 자연치료에 대한 책을 읽으며 알게 된 내용이다. 치료를 하며 통증을 겪는 환자들 중에는 실제 통증 강도보다 더 강하게 통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그들의 심리에 있단다.

 

‘아. 내 몸을 치료하는 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구나.

 내가 이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치료를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하는구나...'


 환자들이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치료를 받게 될 경우 이런 심리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신체는 자동적으로 방어기제 태세로 돌아가게 된다.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경은 예민해지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에 더 쉽게 노출된다. 당연히 통증을 느끼는 감도도 더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일한 치료를 하면서도 환자에게 그 치료에 대한 계획과 효과에 대한 의논을 하면서 환자 스스로가 치료의 선택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할 경우 동일한 강도의 통증에도 훨씬 통증의 강도를 낮게 느끼기도 한단다. 치료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라고 인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내가 가지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치료에 있어서의 주체성.


 암을 치료하는 것도 심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기는 마찬가지다. ‘암’,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 ‘수술’... 이 단어 중 만만하고 쉬운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환자는 자신이 암을 겪었다는, 혹은 겪는다는 자체만으로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늘 느끼고 산다. 그렇기에 당연히 상당한 시간 동안 투병하게 되는 환자의 마음은 심리적으로 자꾸 위축되고 위축된다. 나도 물론 그랬다. 그렇기에 더더욱 치료에 임하는 마음이 ‘당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병이지만, 내 몸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친구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래서 의사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분명히 해둘 것이 사실 하나 있었다. 내가 쓰는 도구는 ‘현대 의학’ 일지 몰라도 그 도구를 고른 사람은 나라는 것. 이것을 인지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치료에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가 판가름 나게 된다. 분명 소극적인 마음자세는 치료가 이어지는 시간을 결코 희망적인 시간으로 채워주지는 못 한다. 긴 치료에 앞서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치료방향에 개입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 모든 치료를 전적으로 의사의 손에 맡기겠다는 결정 또한 온전히 ‘나’의 확고한 의지여야 한다. 치료의 총디렉터는 사실 나인 것이다.  


 결국 이 병과 싸워 이기는 건 첨단 의료진도, 최신 신약도 사실은 아닐 것이다. 꼭 이기겠다는, 혹은 정한 날까지 버티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선택이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것이고 그 뒤를 이어 방법론 있지 않을까.

 결과가 어찌 되든 앞으로의 치료도 그리고 남은 내 인생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기나긴 치료와 만만치 않은 삶으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을 이길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나도 살아갈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