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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Jul 31. 2019

[납량특집] 어느 암병동의 정전

  장마였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낮부터 밤까지 쏟아지고 있었고 창가에는 토닥토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하루 종일 귓가를 울렸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몇몇 환자들은 괜히 감성이 촉촉해지는지 분위기 좋은 카페 타령을 하곤 했다.

 치료실을 갔더니 푸짐한 풍채만큼 평소 인심이 넉넉하신 어머니 한 분께서 옆 침대에 누워 런치 파티를 홍보하고 계셨다. 3일 동안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를 듣고 외출 나가셨다가 마트를 다녀오셨다고.

 "원장님, 점심 드시고 204호로 오세요. 김치전 할 거예요. 아가씨도 건너와요."

아, 김치전. 맛있겠다. 먹어보나 마나 저렇게 푸근한 손으로 만드신 음식은 무조건 맛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기로 했다. 온 병원 어머니 환자분들이 다 모이실 테고 역시나 우리의 대화거리에는 교집합이 없을 것이므로. 요즘 새로 입원하신 낯선 환자분들이 많아서 그분들에게 괜히 나이 든 노처녀 암환자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도 않다. 아, 심장 아파. 내가 표현하면서도 참 찌질한 느낌이다.

 오늘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꽂아주시는 원장님의 침에 '으악'하는 비명으로 응답해드렸다. 나와는 반대로 묵묵히 웃으시며 침을 잘 맞으시는 옆 침대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시며 푸근한 음성으로 한 마디 하셨다.


 "아직 아가씨라 그랴."


  저 '아가씨'라는 말. 혹시 돌려서 하시는 욕은. 아닐까. 하는 못난 생각을 해본다.




 그 날 저녁.

 하늘이 찢어진다는 표현이 생각나도록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번개가 병원 앞마당에 떨어지는 건지 한번 내려칠 때마다 깜깜한 창가가 대낮처럼 환해져 눈이 부실 지경이다. 이러다 내 창으로 번개가 내리 꽂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밤 10시. 추적추적한 빗소리 위로 한층 더 성난 천둥소리가 겹쳐 들리고 번개 쇼도 한창이다. 나는 방에서 두 눈이 빨개지도록 모니터 화면을 보며 영상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요즘 다시 시작된 어지럼증과 싸우는 중이라 운동도 힘들어 이렇게 대부분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열심히 모니터와 단둘이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는데 순간, 퍽!

  갑자기 노트북 모니터 화면만 남은 채 주변이 깜깜해졌다. 책상을 비추어주는 작은 등, 창가에 장식해둔 미니 줄 전구, 역시 창가를 밝혀주는 무드등(깜깜하면 못 자는 겁쟁이라 전력 소모가 심함) 그리고 바깥 복도에서 병실 문창으로 새어 들어오던 불빛까지 모두 꺼져버렸다.

'뭐지? 정전인가? 금방 돌아오겠지.'

살짝 등 뒤가 오싹해져 오려고 했지만 금방 다시 불이 들어올 거라 믿고 무시했다.

1분, 5분, 10분...

금방이라도 반짝! 하고 불이 들어올 거라 기대한 나의 생각과 달리 빨리 회복될 상황이 아닌 듯한 싸한 느낌이 들었다. 점점 나의 모든 신경이 모니터가 아닌 등 너머로 자꾸 분산되기 시작한다. 이곳은 외딴 시골에 있는 인적 드문 병원이고 게다가 그중에서도 제일 안쪽 구석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암병동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외딴 병동은 암흑 천지와 천둥번개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도저히 혼자 앉아 있기가 힘들어 복도로 나갔다. 역시나 깜깜했다. 누군가가 간호 데스크 위에 손전등 기능이 켜진 핸드폰을 올려두어 간신히 불빛이 비치는 상황. 한쪽에선 이미 나처럼 어두컴컴한 방에 있기 힘든 환자 두 분이 자리를 잡고 인사를 나누고 계셨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데스크 한쪽 구석에 서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을 지켜보고 서있어 본다.

"어차피 자야 하는데 정전됐어도 자면 되지 왜 나와 있어요?"

평소 방에서 잘 안 나오기로 유명한 내가 사람들이 모여든 복도에 나와있는 게 신기하셨는지 누군가 나를 향해 물어오셨다.

"아... 무서우서 못 자겠어요. 불이 없으면 못 자서..."

울상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낯익은 푸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직 아 가 씨 라 그 랴."


아... 또 그분.

어머니, 지금 저한테 욕하신 거죠?라는 작은 반발이 마음속에서 욱 하고 올라온 그 순간.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에 예상치 못한 파동이 일었다.

"누가 아가씨여?"

"응? 아가씨가 있었어? 누구?"

"어디가 아가씨라는 겨?"

"207호 환자가 아가씨잖아. 결혼 안 했댜~"


아......

귓가를 울리는 '아가씨라 그랴'와 '누가 아가씨라는 겨?'의 콜라보레이션에 제대로 녹다운되어버리는 이 상황.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시라. 갑자기 모든 어머니 환자들이 다 속으로 내 욕을 하는 것만 같은 이 기분. 나는 이럴 때 뒤통수가 서늘하다.




그냥 확 다시 방으로 들어갈까?

빼꼼히 병실 문을 열어 방안을 들여다봤다.

노트북 화면만 덩그러니 켜진 암흑이었다.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

잠시 들어가 노트북을 안고 다시 나와서 당직 간호 선생님 옆에 앉았다. 이곳에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무서움도 피하고 어머니들 무리도 적당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어느덧 복도는 잠 못 이루는 수많은 인파(?)로 차고 넘쳤다. 게 중에는 사람들 소리에 시끄러워서 자다가 깨서 나온 환자도 있다. 점점 수다의 열기는 더해갔고 어느새 의자를 놓고 동그랗게 둘러앉은 모습은 흡사 캠프파이어장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어디선가 수박까지 한통 쪼개어져 나왔다. 역시 대단하시다.   

  

"아이. 한창 티비 연속극 재밌게 보고 있는데 불이 나가는 거야. 아주 그냥 궁금해 죽겠네."

"나는 전동침대 작동시켜보느라고 침대 허리를 꺾어서 세워놨거든.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된 거여. 이거 뭐 잘 수가 있어야지."

 "꺅꺅꺅꺄악~ 내가 오늘 들은 말 중에 최고 재밌네 그랴."

 

다들 깔깔거리며 물 만난 고기들처럼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점점 이야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3층에 있는 환자들도 꽤 모여들었다. 남자분들도 여기저기 듬성듬성 앉아계셨다. 한쪽 구석에 앉아 그 모든 이야기를 엿들으며 도대체 정전은 언제 복구될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그때였다. 갑자기 평소 얌전하신 어머니 한분이, 또롱또롱한 목소리로, 주변을 압도하며 말했다.

 " 남편한테 물었지. 당신 (19)? 안 (19)? (19)으면 그럼 그다음은 뭐해야 혀? (19)워야지. (19)웠으면 그리고 그다음엔..."

...

네? 어머..니?

......

 갑자기 어디선가 음란마귀가 나타난 것이다.

다들 넘어가신다. 기상천외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시며. 

'세상에, 지금 다 한통속으로 음란해져 있는 거, 실화?'

'주님. 저 지금 혼자 음란마귀들 구렁텅이에 갇혀있어요. S.O.S!'

'나는 저 이야기를 지금 못 듣고 있는 거다, 안 들린다, 나는 모른다...'

 '그래, 지금 나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 맞는 거지? 내가 잘 못 한 거지?'

아... 도대체 여긴 어디고 난 누구란 말인가. 이곳은 역시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럴 때 난 등골이 서늘해온다.




 어느덧 12시를 향하고 있었고 여전히 복구될 기미는 아직이었다. 병원 개원이래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두 눈은 이제 무거워오고 방에 들어갈 엄두는 여전히 안 난다. 환자분들도 실컷 노셨는지 한 분, 두 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 한 분이 전등을 빌려줄 테니 들어가서 자라고 하셨다. 충전식이라 전기 없이도 켜졌다.

 전등을 받아 들고 병실로 들어가 잠시 세수를 하러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섰다. 이렇게 어두울 때는 거울은 안 봐야지.

 세면대 선반에 전등을 올려놓고 가볍게 세안을 마친 후 안 보겠다고 했지만 습관적으로 거울 속을 들여다본 순간.

바로 그때였다. 거울 속에서 끔찍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낯선 존재를 보고야 만 것이다.

분명 어제까지도 없었는데, 내 눈 밑에, 내 눈 밑에,

깊은 주름이 하나가 더 자리 잡은 것이다!

아흑. 너무 놀라 심장을 움켜쥐었더랬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랬다. 나는 이럴 때 등골이 오싸악!해온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잊지못할 여름 휴가의 추억들은 잘 만드셨는지 궁금하네요. (˃‿˂)

모두 더위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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