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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Aug 11. 2019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힘

 또 시작이다. 숲 속의 잠자는 미녀(였으면) 놀이 타임. 깊은 산속 요양병원에서 얼굴이 허옇게 뜬 채 내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누워 자야만 하는 이 놀이는 왕자님 키스 대신 시간이 약이다. 비타민 주사네 포도당 수액이네 하며 식사가 힘든 내게 주사 줄을 연결하려고 간호사가 다가오지만 사실 혈관통(혈관에 약물이 지나가면 통증이 느껴지는 증상)이 심해 성질 부림 지수가 올라갈 수 있으므로 패스하기로 한다. 스트레스는 건강에 해로운 것이고 어차피 이 증상이야 며칠 지나면 자연치유가 되는 증상이므로. 한 며칠 그렇게 곱게 누워 자는 놀이가 어느새 끝나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 놀이 타임. 동굴 같은  병실 문을 스르륵 열고 나와 눈부셔하며 슬슬 치료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단, 면역이 상당히 떨어져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병실을 나설 때마다 간호 데스크에 비치된 마스크를 꼭! 꼭! 챙긴다. 이럴 때 작은 감기라도 감염되면 잠자는 공주 놀이 아니라 응급실로 출퇴근을 할 수도 있으므로. 컨디션 널뛰기는 암환자의 숙명이므로 이제는 이런 일로 일비일희 않는다마는 사실 참 지긋지긋하긴 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하고. 사실 병원에 입원해있는 중이니 그런 증상이 나타난대도 대수롭지 않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그럴까 벌써 걱정이다. 다들 나 같은 건지, 나만 유독 이러는 건지.


며칠 후 장거리 외출을 했다. 오늘은 약수 마시러 가는 날. 전이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마시는 약수다. 올봄, 요양병원에 입원한 이후로는 첫 방문이라 꽤 오랜만이다. 덕분에 언니와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나선다.

 찜통더위라 이런 날의 외출은 지혜롭지 못한 활동이라는 걸 알지만 오늘은 가서 만날 사람도 있다. 나랑 같이 투병하던 J양. 매일 통화만 길게 하는 편인데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아무래도 주말이라 오늘은 북적이는 인파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날이 더워 정말 이러기 싫지만 오늘도 병원에 비치된 푸른빛의 마스크를 귀에 걸었다. 행여라도 공기 중에 떠도는 타인의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지켜줄 건 그래도 역시 이 놈뿐이니까.

 목적지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파가 약수 샘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어디를 가나 무리 지어 모여있었고 다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들이었다. 병원에서 환자들만 보다가 이렇게 생생한 사람들을 만나니 기운이 달랐다. 나도 이 날 하루만큼은 그들 속에 섞여 웃음이 떠나지 않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때때로 이따금씩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야 했지만 말이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인근 식당으로 갔다. 저녁시간이라 테이블마다 손님이 꽉 차서 식당 안은 북적북적했다.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혼자 일어나 데스크로 갔다. 나를 위해 먼 길을 달려준 언니와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J양을 위해 오늘 식사는 내가 결재해야지. 데스크에서 잠시 기다리니 서빙하느라 바쁜 사장님이 이내 카운터로 오셨다.

메뉴를 확인하신 후, 내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꽂으시며 물으셨다.

"어디 치료 중이신가 봐요?"

서글서글한 눈으로 웃으시며 묻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순간 놀라 토끼처럼 눈이 똥그래졌다.

"네. 어떻게 아세요?"

사장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친근한 옆집 아저씨처럼 변하셨다.

"어디.. 무슨 치료 했어?"

"아... 항암치료했는데 아직 회복 중이라서요."

주변은 온통 고기 굽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 티비소리, 주문 들어가는 소리로 그야말로 소란스러웠지만 사장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시더니 말씀하셨다.

"나도 재작년까지 백혈병 치료했어. 급성 백혈병. 골수이식했거든."

"네? 저기 같이 앉아있는 친구가 백혈병 환자였어요."

"응? 어디?"

그랬다. 나와 아주 오랜 친분의 J양은 내가 폐 전이 통보를 받던 비슷한 시기에 백혈병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느라 무균실에 있던 백혈병 환자였다.

"OO아. 여기 사장님도 백혈병 투병하셨었대."

이런 우연이. 우리 테이블로 따라오신 사장님은 여전히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아까 보니까 마스크 하고 들어오더라고. 그거 보니까 나도 옛날 생각나서 물었지."

이 더운 날, 퍼런 병원 마스크를 하고 식당으로 들어온 내가 '좀' 튀었을까. 바로 그 일회용 '병원 마스크' 덕에 서로 사연을 나누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다정하게 먼저 말을 건네주시다니. 기분이 묘했다. 

한창 바쁜 식당의 한쪽 테이블에서 사장님은 낯선 투병 후배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며 투병하시며 힘들었던 이야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이겨낸 이야기, 가족들이랑 이렇게 다시 가게를 운영하시는 이야기 등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특별한 이야기들을 훈훈하게 들려주셨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자리 잡고 넷이서 둘러앉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백혈병 투병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사장님은 건장한 체구였고 얼굴도 밝아 보이셨다. 두건으로 짧은 머리를 가리고는 계셨지만 그마저도 스타일리시해 보이셨다. 식당일이라는 게 힘들다고 소문이 나있는데 어떻게 가능하신 건지. 참 열심히 사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지.

 그렇게 잠시 대화를 주고받은 후, 사장님도 우리도 아쉬운 마음을 응원의 말로 대신하며 식당을 나왔다. 테이블 위에 잠시 벗어둔 마스크도 다시 잘 챙겼다.

 

  생각지 못한 이런 만남이 있을 때면 괜히 마음 한편이 든든해온다. 그리고 정말 큰 힘이 된다. 다 알 수는 없지만 내 주변 어딘가에 또 다른 제2, 제3의 그 식당 사장님 같은 분들이 계시겠지.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선가 응원을 해올 것만 같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더 나를 다독일 힘도 생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고 분명 다 괜찮을 거라고, 힘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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