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우 Nov 17. 2019

시간을 샀다. 어떻게 써야 할까.

돈을 대하는 퇴사자의 자세

    스트레스 때문에 조금만 더 고민했으면 쓰지 않았을 돈을 마구 써재끼는 일도 없어졌고, 돈 한 푼 없이 여유를 즐기는 법에도 익숙해졌다. 그렇다 해도 돈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켜는 노래 어플이 월에 얼마, 밥 먹을 때 보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가 또 얼마, 음식을 만드는데도 재료비가 들고, 와이파이, 핸드폰 요금, 대출이자 등등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돈으로 구매한 서비스들이 내 일상을 지탱해주고 있다.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월급생활자에게 소비란 흐르는 물과 같다. 벌이가 크건 작건 늘 같은 수준으로 쓰면 다음 달엔 반드시 채워진다. 회사를 그만두는 건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과 같다. 통장은 밑 빠진 독이 되어버린다. 남은 잔고에서 월 생활비에 몇을 곱해 빼면 ‘0’이 될지 빤히 보인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엔 ‘지출을 늘리긴 쉬워도 줄이긴 어렵다던데 지금의 소비습관을 잘 고칠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을 했었다. 기우였다. 돈을 아끼는 건 결심이랄 것도 필요 없이 거의 자동으로 가능해진다. 마치 아침 일곱 시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 직장인처럼, 육칠천 원씩 하는 디저트에 앞에서 퇴사자의 지갑은 저절로 닫힌다. 돈을 벌지 않는 건 불안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누가 마냥 신나게 돈을 쓰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열심히 소비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아쉽게도 시간이 그 자체로 의미 있지는 않다. 어떤 경험과 결합했을 때 가치가 발생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개 돈이 든다. 회사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그게 일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적당한 여유를 가지며 나를 재정비하고, 다음 걸음을 위해 탐색하는 시기를 가지려고 퇴사했다.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뇌를 깨우고,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 시기가 굉장히 값지고 소중하다. 어떻게든 잘 보내고 싶기에 늘 경험하는 쪽을 택한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사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시간은 꽤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기회비용의 개념을 적용하면, 일 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최소 연봉만큼의 돈은 지불한 셈이다. 돈으로 시간을 샀기 때문에 돈이 없는 거다. 거기다 직업을 유지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여러 비계량적인 요소들까지 고려하면 지금 이 순간의 가치는 더 커진다. 그런 비용을 치르고 구입한 시간을 온통 마음 졸이며 보내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다. 즐기지 못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여전히 불안이 찾아오고, 종종 초조해진다. 그럴 땐 내가 몇천만 원짜리 세계여행을 떠난 여행자라는 상상을 해본다. 돈을 아끼기 위해 호텔 안에만 머무를 것인가, 밖으로 나가 세상을 경험할 것인가. 당연히 후자다. 내 의지로 시작한 여행이다. 써야지. 돈이 떨어지면 벌어서 또 써야지. 좋은 곳, 좋은 삶을 발견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이까짓 물건을 사느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